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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단체 릴레이 탐방]⑧ 육군예비사관학교 총동문회

안승회

입력 2020. 05. 20   16:57
업데이트 2023. 08. 0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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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사진 찍고 전장에 나가… 나라 위해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지”


노무부대 진두지휘하며 전장 한가운데 누벼 
지게에 포탄·식량 싣고 나르며 승리 기여
창설 당시 800여 명이던 회원, 280여 명 남아
내년 임관 70주년… 활약상 널리 알리고파  

김면중(89·왼쪽) 육군예비사관학교 총동문회장과 이근용(89) 부회장이 서울 용산구 청파동 육군예비사관학교 총동문회관에서 임관 당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두 사람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육군예비사관학교 1기로 나란히 임관했다. 안승회기자
김면중(89·왼쪽) 육군예비사관학교 총동문회장과 이근용(89) 부회장이 서울 용산구 청파동 육군예비사관학교 총동문회관에서 임관 당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두 사람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육군예비사관학교 1기로 나란히 임관했다. 안승회기자



‘작전은 전투에서 승리하지만, 군수는 전쟁에서 승리한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보급품 공급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6·25전쟁에서도 시기적절한 군수지원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당시 노무부대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무명의 고지에서 탄약과 식량을 나르며 맹활약했다. 육군예비사관학교(Reserve Officers Training School) 출신 예비 소위들은 이러한 노무부대를 진두지휘하며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한가운데를 누볐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내던졌지만, 오늘날 예비사관학교를 기억해주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국방일보는 6·25전쟁 70주년을 앞두고 예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헌신과 희생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기 위해 지난 12일 예비사관학교 총동문회를 찾았다.

1951년 경주 육군예비사관학교 1기 임관 

서울 용산구 청파동 한 건물에 마련된 육군예비사관학교 총동문회관. 김면중(89) 총동문회장과 이근용(89) 총동문부회장이 10평 남짓의 작은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던 백발의 두 참전용사는 몇 해 전부터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사무실에 나온다고 한다. 고령으로 출근이 힘들어진 탓이다.

김 회장은 “동문회 창설 당시 회원이 800여 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이 280여 명이고 활동하는 회원은 30명에 불과하다”며 “내년 임관 70주년을 맞아 예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활약상을 기록으로 남겨 널리 알리고 싶었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정부에 등록된 6·25전쟁 참전 유공자 중 생존자는 8만9600여 명이다. 참전 유공자의 평균 연령은 90세로 해마다 생존자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었던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두 사람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7월 13일 경주에서 육군예비사관학교 1기로 나란히 임관했다. 당시 우리 군은 북진이 이뤄질 경우 후방 치안을 담당할 정예 요원을 선발하기 위해 예비사관학교를 창설했다. 인사와 행정은 육군본부가 맡고 작전지도와 보급은 주한 미8군사령부가 지원하는 체제였다. 예비사관학교는 육군5군단 소속으로 경주고등학교에서 교육을 시작했다. 먼저 국민방위군사관학교 3기 후보생 중 선발된 1000명이 졸업과 동시에 예비사관학교에 입교, 18주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예비 소위로 임관했다.

재향군인회에 따르면 1951년 7월 13일 예비사관학교 1기 930명이 경주고에서 임관한 데 이어 그해 8월 9일에는 2기 333명, 10월 1일에는 3기 1049명, 10월 15일에는 4기 261명이 경주문화여고에서 각각 임관했다. 같은 해 10월 15일 육군예비사관학교는 짧은 역사를 뒤로하고 해체됐다. 김 회장은 “당시 후보생들의 나이는 19세부터 30세까지 10년 이상의 격차가 있었고, 학생·교사·공무원·회사원 등 신분도 다양했다”고 말했다.

치열한 고지전… 산 정상까지 보급품 전달

예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주로 한국노무단(KSC·Korean Service Corps)에 배치돼 노무대원을 관리·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유엔군은 1951년 6월 전투병력을 절감하고 전장에 적시에 보급품을 지원하기 위해 민간인 운반단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노무자를 흡수해 한국노무단을 창설했다.

당시 치열한 고지전이 곳곳에서 벌어졌지만, 산악지형의 특성 때문에 군수물자를 제때 지원하기 어려웠다. 이때 노무대원들이 지게에 포탄이나 식량 등의 보급품을 싣고 산 정상까지 올라가 아군에게 전달하며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전사자와 부상병을 지게에 지고 부대로 옮기기도 했다. 제임스 A.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은 훗날 ‘라이프(LIFE)’지 기고를 통해 “만일 KSC가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 정도의 미군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어야만 했을 것”이라며 노무대원들의 활약상을 회고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노무대원들을 인솔한 우리 예비 소위들은 총알이 빗발치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장을 수없이 오갔다”며 “후방지원이 없으면 전투를 치를 수 없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목숨 걸고 임무를 완수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부회장은 “전사할 경우를 대비해 임관 직후 영정 사진으로 쓸 사진을 한 장 남기고 전장으로 나갔는데 지금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있다”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김 회장이 임관 후 참전할 당시 나이는 20살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전쟁 초기 며칠 만에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어졌고 내 가족, 내 나라를 지키려면 반드시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예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에겐 설움의 기간도 있었다. 예비 소위들이 정식 육군소위로 인정받은 것은 1953년. 전쟁이 끝날 무렵에야 예비사관학교 출신들에게 육군소위 임관장이 재교부됐다. 김 회장은 “당시 예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2년 동안을 예비역 소위라는 계급으로 있으면서 진급도 못했지만, 다른 육군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김 회장은 “6·25전쟁 당시 예비사관학교처럼 단기간에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의 역할이 중요했다”며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예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희생과 헌신을 부디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안승회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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