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MZ세대를 말하다

전문가보다 만물박사

입력 2020. 05. 12   16:41
업데이트 2020. 05. 12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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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잡학피디아: 잡학+위키피디아, 넓고 얕게 지식을 탐하다


빨리 변하는 세상… 신기술·신제품 나와도 전문가 검증 시간 걸려
사용자가 즉시 지식 제공, 백과사전형 위키백과·나무위키 등 인기
전문용어 빼고 대중 언어로 접근…대중의 호기심 빠르게 충족시켜 



만물박사(Generalist) 대(vs) 세부전문가(Specialist)

미국의 한 경영대학원 교수가 학생들에게 여러 방면을 두루 아는 만물박사(제너럴리스트·Generalist)와 세부전문가(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중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미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대개 세부전문가인 스페셜리스트가 되겠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이나 일본에서 온 유학생들은 만물박사형의 제너럴리스트가 되겠다고 했다. 서양 친구들은 어느 한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조직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아시아에서 온 학생들은 우선 동아시아적인 가치로 두루 인간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보이고자 했고, 나아가 최고경영자로서 전문가 이상의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기술이 있어야 한다’와 ‘다양하게 알아야 한다’ 중 어느 것이 맞을까. 산업화 이전에는 인간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알고 관통하는 지혜를 표현하는 이들이 기업에서도 우대받았다. 과거시험에 급제하는 이들과 같은 전인적 지식이 우선이었다. 그러다가 산업화 시대가 열리면서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20세기 말까지 아날로그 시대에는 기업의 마케팅이나 제품 자체가 단선(單線)형이었다.

시간과 장소가 한정된 광고나 이벤트 활동, 특정 기능의 제품 자체가 단독으로 존재했다. 그런데 디지털시대에 들어서는 아메바와 같이 유연한 형태의 면(面)들이 서로 연결됐다가 떨어지며 이합집산을 하는 양상으로 마케팅과 제품 개발이 변했다. 제품 간에도 예전에는 별개의 제품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하나로 합쳐지고, 또 그런 복합제품에서 또 다른 파생상품들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마케팅 활동에서도 매체와 소비자의 생활공간이 뚜렷한 구분 없이 뒤섞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저 좁게 전문가라는 타이틀 아래 한 우물만 파고 들어서는 진정한 경쟁력을 가질 수 없게 됐다.

구글로 백과사전에 나올 만한 항목을 검색하면 위키백과, 나무위키, 미디어위키와 같이 꼭 전문가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용자들이 내용을 올리는 ‘위키’류들이 먼저 뜨는 경우들이 많다. 왜 그럴까?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 새로운 기술이나 신제품이 나오는데, 전문가들은 검증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앞서가는 대중의 호기심을 전문가들의 공론화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 자료를 내놓는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의 언어와 거리가 먼 그들만의 용어들이 난무하기 십상이다. 특정 항목에 ‘덕후’가 되고자 깊이 있는 지식을 찾는 MZ세대도 있지만, 대개 그런 ‘최애’를 찾기 위한, 또는 순간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얕은 지식을 찾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제시되는 통로를 찾으니 위키가 제격이 된다. 위키 이외에 지식 습득 채널이 늘어난 사실도 전문가들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데 일조했다.


다양해진 지식 습득 채널

팟캐스트는 ‘귀로 듣는 백과사전’이라고 한다. 2010년대 중반까지의 팟캐스트는 정치, 자기계발 등에 집중돼 있었다. 그때는 ‘주변에서 다들 재미있다고 해서’ 듣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 MZ세대는 ‘내가 알고 싶은 분야라서’ 듣는다. 그만큼 분야도 다양해졌고, 전문가의 권위가 힘을 쓰지 못하고 누구나 가볍게 다루는 채널이 됐다. 웹툰 ‘미생’의 윤태호 작가는 팟캐스트를 두고 “친구가 해주는 말 같은데 나보다는 똘똘해 권위에 대한 어려움이 없다”고 표현했다. 지식에 대한 벽을 낮추고, 범위는 넓히고 한 것이다.

공중파나 케이블TV의 지식 예능들은 팟캐스트의 TV 버전이라고 하는데, 화면과 함께 지적인 수다가 펼쳐진다. 대표 프로그램으로 꼽히는 ‘알쓸신잡’의 ‘알아두면 쓸데 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이라는 제목이 뜻하듯, 전문가다운 권위나 소명의식 같은 것은 없다. 여행지로 찾아간다고 해도,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소위 ‘강단에서 내려온 수다쟁이들’이 가볍게 자기 분야의 얘기를 너르게 펼친다. 이런 패널들의 수다뿐만 아니라 강의 형태의 프로그램도 속속 출연했다. 과학자, CEO, 경제학자, 학원강사 등 다양한 경력의 인물들이 출연했다. MZ세대에 속하는 인물들이 청중 대표이자 질문자로 나서서 토크쇼 형태도 가미시키면서, 시청자들의 접근성을 높였고, 특히 MZ세대에 어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즉석 떡볶이의 메카, 신당동 떡볶이 골목은 신당역 몇 번 출구인가?’ 정답을 낼 수 있다면 ‘떡볶이 마스터즈’에 도전할 만하다. 대학교의 학과 이름이 붙은 ○○학 같은 것만 지식이 아니다. 간식으로 즐기는 먹거리들도 충분히 지식으로 대접받는다. 와인 소믈리에보다 되기가 더 어려운 치킨 소믈리에가 나왔고, 식당마다 미묘하게 다른 냉면 맛을 정리한 ‘냉면도감’이 등장했다. 음식과 어울리는 술을 주로 찾아서 매치시키는 ‘페어링(pairing)’ 맞추기도 MZ세대를 중심으로 지적인 놀이로 인기를 끌고 있다.

책이 있는 공간 자체를 매력 있는 콘셉트로 꾸미면서 자연스럽게 책을 찾게 만드는 서점들도 MZ세대가 지식을 찾는 채널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책과 술의 페어링을 시도하는 ‘서점+술집’도 다수 등장했다. 이런 조류의 선도자로 꼽히는 일본의 쓰타야 서점은 아예 같은 이름의 수제맥주까지 팔고 있다. 서점을 벗어나서 책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모임들도 많다. MZ세대를 회원의 주축으로 꽤 비싼 가입비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2월 기준 6000명 이상의 회원 수를 자랑하는 기업형 독서모임이 있다. 독서까지도 사교육 형식으로 한다든지, 데이트 짝짓기가 실제 목적이라는 식의 기성세대의 비판이 있다. 하지만 독서의 새로운 형태로 지적인 놀이문화의 측면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인스타그램 역시 MZ세대에게는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지식을 얻고 익히는 도구가 된다. 특히나 코로나19로 한동안 강요된 ‘집콕’을 하면서, 기업에서 인스타라이브로 관련 상품이나 서비스의 지식을 전하는 사례가 눈에 띄었다. 특히 원래 야외에서 사용하는 스포츠 카메라나 운동복, 골프클래스 등에서 사용법에 더해 알아두면 쓸모 있고 아는 척할 수 있는 지식들을 가볍게 전달했다.


내 앞가림 잘하는 마니아가 되고 싶다

잘 모르는 분야가 있으면 선배나 교수의 도움을 청하고 전문가들의 서적을 추천받아 보는 게 자연스러웠다. 이제는 바로 위에서 본 것처럼 자신이 직접 재미까지 느끼면서 해결할 방도를 찾기 쉽다. 그것들을 자신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쓸 수 있도록 공유한다. 공유하기 좋은 방식으로 포장하여 내놓으면서 더욱 넓게 퍼진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의 잡학피디아를 MZ세대는 만들어간다.

위키를 기반으로 한 잡학피디아의 세계에서는 전문가의 권위가 되는 깊이보다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폭을 따진다. 이들은 “마니아는 되고 싶지만 꼰대는 되기 싫다”고 말한다. 핵심 사실을 깔끔 정리한 ‘팩트’에서 그치지 않고, 그 팩트들이 자유롭게 얽히는 새로운 지식의 세상을 MZ세대는 향유하며 펼치고 있다.


<박재항 대학내일 20대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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