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참전단체 릴레이 탐방 리멤버 솔저스

[참전단체 릴레이 탐방]⑦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서현우

입력 2020. 05. 06   16:21
업데이트 2023. 08. 1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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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계급도 없던 학생들, 유격군의 시작이었다


미군, 1951년 34개 부대 공식 편제 
총 3만2000여 명 4400여 회 전투
적군 살상·선박 파괴·첩보 등 활약

 
1970년 美 문서 통해 세상에 알려져
의병 형태로 전사자 찾기 쉽지 않아
유격군 명예회복 활동 계속돼야   
 

유격군은 6·25전쟁에서 4445회의 유격작전을 펼쳐 적 6만9000여 명을 살상하고, 첩보입수·도서점령·유엔군 구출 임무 등을 수행했다. 전쟁 당시 유격군의 모습.
유격군은 6·25전쟁에서 4445회의 유격작전을 펼쳐 적 6만9000여 명을 살상하고, 첩보입수·도서점령·유엔군 구출 임무 등을 수행했다. 전쟁 당시 유격군의 모습.

 

 

6·25전쟁에서 유격군이 전개했던 작전활동을 담은 자료.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연구팀이 작성했다.
6·25전쟁에서 유격군이 전개했던 작전활동을 담은 자료.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연구팀이 작성했다.

 

6·25전쟁 승전의 바탕에는 수많은 국군과 유엔군의 헌신이 있었다. 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한 무명용사들의 희생도 있었다. 이들은 오로지 조국을 지킨다는 신념 하나로 치열한 전투를 펼쳤고 장렬히 산화했으며 결국 숭고한 뜻을 이뤘다. 지금 우리의 번영된 삶은 과거 그들의 목숨으로 일궈낸 결과다. 우리가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달 ‘리멤버 솔저스’에서는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유격군총연합회)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치치안대에서 최정예 유격부대로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곧장 전진해 약 1개월 만에 북한지역 대부분을 점령했다. 하지만 산간 음지에 피신한 적 패잔병과 잔당들은 각지에서 출몰해 양민들을 학살했고, 이에 양민들은 자치치안대를 조직해 맞섰다. 군에 가지 않은 중·고등학생들이 참여했고 버려진 무기를 활용하며 반공단체로 발전했다. 유격군의 시작이었다.

이후 각 지역 자치치안대들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자 이들 뒤에서 남진하는 중공군과 싸우며 후퇴했다. 일부는 황해도 인근 서해 북부 도서 지역으로 이동·집결해 향토 회복작전을 도모했다. 간혹 내륙으로 침투해 고향에 남은 가족과 함께 남하하거나 게릴라식 활동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재북진을 기다리기도 했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군 내에서는 적 주력부대에 대한 견제전략으로 적 후방에 투입해 타격하는 소부대 유격전술의 필요성이 꾸준히 대두됐다. 자치치안대를 비공식 지원하던 미군이 1951년 극동군사령부 예하에 유격부를 둬 34개 유격부대를 편성하면서 자치치안대들은 미군 편제에 들어갔다. 이때 탄생한 유격군 부대가 백령도기지의 동키 1~15, 20~21부대, 교동도기지의 울팩 1~8부대, 부산·동해기지 9개 부대 등 34개 부대다.

이들은 부대당 270명에서 1500명 내외로 조직돼 황해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내 침투작전 및 남진 중공군 교란작전을 펼쳤다. 총 3만2000여 명의 유격군은 4400여 회의 크고 작은 전투를 수행했다. 적 6만9000여 명을 살상하고 950여 명을 생포했으며, 적 무기·탄약·차량·선박을 노획하거나 파괴했다. 또 휴전 직전까지 서해 북방 도서 30여 개를 장악해 첩보 작전기지로 활용하면서 제공권·제해권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희생과 헌신

그러나 유격군의 전공·전과는 전쟁 이후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유격군 대부분은 이름도, 계급도 없이 참전한 ‘의병’이자 ‘의용군’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비밀해제된 문서를 통해 유격군의 활약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연구팀이 비밀해제 문서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가 공개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유격군총연합회 역시 이 같은 사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지난 수십 년간 유격군 전사자 확인 작업에 집중했다. 34개 부대마다 행정적 절차가 없거나 미흡해 전사자의 인적사항을 찾아내기 어려웠다. 이름도, 계급도 남기지 않은 채 이름 모를 산야에서 장렬히 전사한 이들이었다.

유격군총연합회는 1992년부터 약 21년간 생존자 개별신고 및 부대원 확인 동의, 각 유격군부대 전우회와 총연합회 심의를 거쳐 전사자 확인 등록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95년 6월 처음으로 2140위를 대전현충원에 봉안했다. 또 2013년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총 5196위의 전사자 위패를 봉안했다. 이 중 시신을 수습해 매장한 전사자는 14명, 유족이 확인된 전사자는 2명뿐이었다.

이와 함께 유격군총연합회는 전우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매년 현충일에 맞춰 서울현충원에 마련된 유격부대 전적위령비에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유격군 참전용사들의 고령화로 행사 개최가 어려워진 2018년부터는 육군특수전사령관 주관으로 추모제를 이어오고 있다.

아울러 유격군의 공덕과 영예를 선양하기 위해 서울 양재동과 정릉동, 인천 백령도와 교동도 등 4곳에 전적비 및 위령비를 세웠고, 6·25전쟁 참전 공덕 기념탑 건립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또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유격군 전사자 명비 봉안사업을 벌여 지난 2013년 12월 전사자 전원을 봉안했다. 6·25전쟁 서훈 누락자 재신청 제도를 활용해 전우들의 공적을 기억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격군총연합회 박충암 회장은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는 유격군 전우들의 활약에 대한 재조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죽는 날까지 계속 활동할 것”이라며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친 유격군의 희생과 헌신을 꼭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서현우 기자

사진=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제공

“눈부신 활약 펼쳤지만 공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희생·헌신 꼭 기억해주길”

 박충암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장 

 

“전쟁 당시 내 나이 열여덟이었습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오로지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하나뿐이었습니다.” 

한국유격군전우회총연합회 박충암(사진) 회장은 6·25전쟁 당시를 회고하며 말문을 열었다. 박 회장은 “나뿐만 아니라 유격군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며 “이름도, 계급도 없이 목숨을 다해 적과 싸웠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우가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

자치치안대로 시작한 유격군은 활동 초기 총 한 자루, 군복 한 벌 없이 적과 싸우겠다는 강한 의지 하나로 버티고 이겨냈다는 것이 박 회장의 이야기. 나라를 지키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신념이 그들을 유격군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박 회장은 “3만2000여 명이 유격군으로 참전해 4445회의 유격작전을 펼쳤다”며 “적 6만9000여 명을 살상했고 무기·탄약·차량·선박을 노획했으며 교량·철도·건물을 파괴했다”고 강조했다. 또 “추락한 유엔군 소속 공군기 조종사 29명을 구출하고 1만4700여 건의 첩보를 입수했으며 서해 북방 도서를 점령, 작전기지로 활용해 서해에서의 제공권·재해권을 확보했다”고 덧붙였다.

유격군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유격군의 공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박 회장이 “확인된 유격군 전사자 5196명의 현충원 위패 봉안을 지난 2013년까지도 계속했고, 이들의 6·25전쟁 무공훈장 서훈은 공적 사실 증명이 쉽지 않아 아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박 회장은 “생존자로서 전사한 전우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며, 후배 장병들과 국민들이 유격군을 비롯한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꼭 기억해줘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목숨 바쳐 지켜낸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굳건히 지켜내기 위해서는 전쟁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박 회장의 생각이다.

“소중한 가치를 지켜내는 모든 일이 숭고한 정신이고 그 모든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이 땅 위의 우리는 모두 한뜻으로 지금의 자유와 평화를 오롯이 지켜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억해 주십시오. 희생과 헌신으로 대한민국을 지켜낸 우리 유격군들을….”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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