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완결 한주를열며

[이종원 한 주를 열며] 몰입의 즐거움

입력 2020. 04. 24   15:26
업데이트 2020. 04. 2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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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 원
월간 ‘샘터’ 편집장
이 종 원 월간 ‘샘터’ 편집장


지난 2월 하순부터 시행됐던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될 조짐을 보여 다행이다. 코로나19가 다소 진정세로 접어든 덕분에 초·중·고등학교들이 미뤄두었던 신학기 개학을 검토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도 들려온다. 겨우내 굳게 닫혀 있던 교문이 다시 열릴 거라는 소식을 들으며 아마도 가장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건 겨우내 아이들 학습관리에 골머리를 앓아온 학부모들일 것이다.

지난해 12월부터 넉 달째 이어지는 길고 긴 겨울방학은 나처럼 맞벌이하는 가정에는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다. 코로나19로 인해 3월 말부터 상당수 학원이 휴원한 영향으로 대부분 가정이 ‘아이들 관리’에 임계점을 맞았다. 예년보다 길었던 겨울방학이 새삼 일깨워준 건 사람은 원래 유희 본능을 가진 존재(호모 루덴스)라는 것이었다. 일반 학기에 평균 9시간이던 아이들의 학습시간이 올겨울엔 절반 이하로 대폭 줄었고, 수면시간과 휴식·계발시간은 1~2시간씩 더 늘어났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일정 기간 수업을 쉰다는 방학(放學)의 취지를 생각하면 수긍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하루 세끼 먹을 것과 일과까지 신경 써야 하는 학부모 처지에서는 길어진 겨울방학을 마냥 반길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집만 해도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는 제 말마따나 ‘정말 격렬하게’ 놀고먹는 일로 긴긴 겨울을 보냈다. 어쩌면 저렇듯 지치지 않고 매일매일 새로운 놀 거리를 찾아내는지 신기할 정도로 녀석은 노는 일에 진심을 다하는 것 같았다. 많지 않은 학원 숙제를 서둘러 마치고 나면 녀석은 하루의 대부분을 다이어트를 겸한 아이돌 댄스 연습에 투자했다. 그랬던 딸아이가 뜬금없이 개인 블로그에 웹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웬만큼 최신 춤을 다 숙달해버린 두어 달 전의 일이다. 틈만 나면 거울 앞에서 몸을 흔들어대던 수다쟁이가 웬일로 방에서 두문불출하기에 들여다봤더니 또래 아이들이 좋아한다는 웹 소설에 도전할 거라며 노트북 앞에 앉은 모습이 꽤 그럴싸해 보였다.

과연 녀석은 공언한 대로 일주일에 한두 편씩 짧은 연애소설을 써서 연재를 이어나갔다. 남자친구 하나 못 사귀어본 ‘모태 솔로’ 주제에 아이돌 외모의 남녀 대학생이 주인공인 연애소설이 가당키나 하냐고 놀려대던 나는 몇 달 전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진로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몰라 너무 두려워요”라고 말하며 와락 눈물을 쏟던 녀석의 얼굴이 떠올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학원수업·과외수업에 허덕거리던 녀석이 무엇 한 가지에 저토록 즐겁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얼마 만인가 싶었다.

허락 없이 블로그 글을 엿보지 않겠다는 ‘부녀협정’에 따라 지금껏 글 한 편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지만, 매회 고정구독자가 1000명을 넘어섰다고 귀띔하는 걸 보니 새로 찾아낸 웹 소설 놀이를 녀석이 꽤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이어도 상관없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삶의 한순간, 온 마음을 다해 몰입해볼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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