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백년이 더 걸리더라도… 인디언 영웅의 부활을 보고 싶다

입력 2020. 03. 13   16:58
업데이트 2020. 03. 1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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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美 크레이지 호스 기념물


“인디언에게도 위대한 영웅이 있다”
리틀빅혼 전투서 커스터 부대에 대승
인디언 전사 ‘크레이지 호스’ 재현
1948년 착공…얼굴만 27m 달해
완공까지 최소 100년 이상 걸릴 듯 


조각가 코작 지올코브스키가 직접 만든 크레이지 호스 기념물의 1/34 크기의 모형(왼편)과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기념물 전경(오른편).  사진=muskratmagazine.com
조각가 코작 지올코브스키가 직접 만든 크레이지 호스 기념물의 1/34 크기의 모형(왼편)과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기념물 전경(오른편). 사진=muskratmagazine.com
조각가 코작 지올코브스키(왼쪽)와 헨리 스탠딩 베어 추장.
 사진=www.blackhillsbadlands.com
조각가 코작 지올코브스키(왼쪽)와 헨리 스탠딩 베어 추장. 사진=www.blackhillsbadlands.com

미국 중북부 사우스다코타 주의 블랙힐스 러시모어 산에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에이브러햄 링컨 등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4명의 대통령 얼굴을 각각 18m 높이로 새겨놓은 얼굴상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27㎞ 떨어진 선더헤드 산에 인디언 영웅인 크레이지 호스의 기념물이 있다.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성난 말, 1840~1877)는 인디언 전사의 이름으로, 리틀빅혼 전투(1876)에서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1839~1876) 중령과 기병대원 262명을 섬멸한 인물이다. 이 전쟁은 인디언 전쟁(1622~1890) 중 미국을 상대로 인디언이 가장 크게 승리를 거둔 전쟁이다.

1948년 조각가 코작 지올코브스키에 의해 착공된 크레이지 호스 기념물은 70년 넘는 기간 동안 제작 중인데 1998년 완성된 두상의 높이만 27m로 미 대통령 얼굴상보다 9m나 더 크다. 전신상이 완성되면 높이 171.6m, 너비 195.4m에 이르게 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조각상이 된다.


미국 남북전쟁 중에 일어난 다코타 전쟁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영국과 독립전쟁(1775~1783)을 벌여 승리한 후 1783년 독립했다. 1803년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를 헐값에 사들인 것을 시작으로 미국의 영토는 미시시피 강을 건너 서쪽으로 계속 넓어졌다. 중부 대평원이 대규모 목축업에 적합한 곳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디언들에게 돈을 주고 땅을 샀지만, 이들이 땅을 팔지 않자, 1830년 5월 28일 인디언 이주법이 발효됐다. 이 법으로 수많은 인디언들이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하고 본래의 땅을 빼앗겼다.

대평원에서 쫓겨나 보호구역에 수용된 인디언 부족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숫자가 많은 부족은 다코타 족(Dakota)으로 블랙힐스에 살고 있었다. 주요 식량이었던 아메리카들소가 줄어들어 배급품에 의존해 살아가던 다코타 족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미국 남북전쟁(1861~1865) 초기인 1862년 8월 17일 반란을 일으켜 다코타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소수 민족의 폭동에 불과했기에 미국 정부에 의해 무력 진압된 후 1862년 링컨의 지시로 38명의 다코타 족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인디언들의 최대 승리인 리틀빅혼 전투

다코타 족의 비극은 끝이 아니었다. 1870년대에 블랙힐스에서 금이 발견되자 남북전쟁으로 재정이 부족해진 미국 정부는 인디언 영토인 다코타 족 보호구역을 점령하고자 했다. 미국이 다코타 족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대신 미국인의 안전한 통행을 보장받는 라라미 조약(1868)을 어기면서 1875년 말 모든 다코타 족에게 이듬해 1월 31일까지 보호구역으로 이주해야 하며 이를 거부하면 미국의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최후통첩에 맞서기 위해 다코타 족과 쉐이엔 족, 아라파호 족이 리틀빅혼 강변으로 모여들었다.

1876년 6월 25일 커스터 중령이 이끄는 제7기병대가 리틀빅혼 강변에 있는 다코타 족 등의 인디언을 발견했는데 당시 커스터가 이끌고 있던 기병대 병력은 262명이었다. 하지만 커스터는 공을 세우기에 급급했고 지형지물과 인디언 전사들의 규모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무작정 돌진하면서 리틀빅혼 전투가 시작됐다. 리틀빅혼에 있던 인디언은 대략 7000명 정도이고 전사들의 수는 1500~2000명 정도였는데, 크레이지 호스가 이끄는 인디언들은 이미 인디언 예언가인 시팅 불(Sitting Bull·앉은 황소, 1831~1890)이 한 승리 예언에 의해 고무돼 있었다. 본대와 떨어져 단독 행동한 커스터의 부대는 수적으로 웃돌았던 인디언에 의해 전멸됐다.


리틀빅혼 전투 이후 몰락하는 인디언


리틀빅혼 전투는 인디언들이 대승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대대적인 보복을 불러온다. 크레이지 호스는 자신을 계속 추적하는 미국 군대를 피해 가족과 부족을 데리고 피신했다가 거주지와 식량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투항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미국 정부에 항의해 수감됐고 이후 탈출을 시도하다가 칼에 찔려 1877년 9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시팅 불마저 1890년 12월 15일 스탠딩 록 보호구역에서 그를 체포하려던 경찰에 의해 살해됐고, 그로부터 14일 후인 12월 29일 운디드니 언덕에서 제7기병대가 다코다 족을 무장 해제하던 중 1명의 전사가 칼을 놓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격을 가해 300명 이상의 여자와 어린아이였던 인디언들을 학살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 인디언 전쟁은 종결됐다.


1948년 조각가 코작 지올코브스키 작업

인디언들이 신성시하는 러시모어 산에 조각가 거츤 보글럼이 400명에 가까운 조각가들을 동원해 1927년부터 대통령 얼굴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다코타 족 추장 헨리 스탠딩 베어(Henry Standing Bear·서 있는 곰, 1874~1953)는 1939년 폴란드 출신 조각가이자 러시모어에서도 일했던 코작 지올코브스키(1908∼1982)에게 “나와 동료 추장들은 인디언에게도 위대한 영웅들이 있다는 것을 백인들에게 알리고 싶소”라는 편지를 보냈다. 고심 끝에 코작 지올코브스키는 선더헤드 산에 크레이지 호스를 조각으로 새기는 데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해 1948년 6월 3일 바위산 정상에서 첫 발파 작업을 했다. 당시 수백 명의 인디언들이 이 광경을 참관했는데, 이들 중에는 리틀빅혼 전투의 참전 용사들 가운데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5명도 있었다.

코작 지올코브스키가 세상을 떠난 1982년 이후 그의 가족들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말을 탄 인디언 전사가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어질 크레이지 호스 조각상은 현재 말머리 조각이 제작 중이다. 또 미국 원주민 역사박물관, 종합대학, 의료교육센터도 지어질 예정이다. 경비 일체를 개인 기부금과 입장료, 기념품 판매 수익으로만 충당하고 있어서 완성까지는 최소 10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미국 정부는 1937년부터 콜럼버스의 상륙을 기념하는 ‘콜럼버스의 날’을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정하고 공휴일로 지정했다. 하지만 이날은 인디언 학살의 상징일로 인디언들이 ‘원주민의 날’ 시위를 여는 날이기도 하다. 사우스다코타 주의 시민들 역시 크레이지 호스 기념물에 모여 원주민의 날을 개최한다. 우리 생애 크레이지 호스 기념물이 완성되는 날을 볼 수 있을까.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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