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나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비극의 역사를 배운다

입력 2020. 01. 10   17:25
업데이트 2020. 01. 1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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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


나치 홀로코스트 대표하는 건축물
유대인·전쟁포로 등 400만 명 학살
가스실·소각장 등 참상 그대로 보존
박물관으로 지정…세계문화유산으로
메르켈 총리 등 방문해 과거사 사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전경. 사진=fortune.com.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전경. 사진=fortune.com.
나치 친위대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들을 선별하는 모습. 이 사진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독일 나치 친위대에 의해 1944년 5월 말 또는 1944 년 6월 초에 촬영됐다. 사진=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
나치 친위대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들을 선별하는 모습. 이 사진은 신원을 알 수 없는 독일 나치 친위대에 의해 1944년 5월 말 또는 1944 년 6월 초에 촬영됐다. 사진=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 서쪽으로 50㎞ 떨어진 오시비엥침(Oswiecim)에 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아우슈비츠)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독일 나치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오시비엥침의 명칭은 독일어인 아우슈비츠(Auschwitz)로 변경됐는데, 1940년 6월 나치 친위대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이곳에 제1수용소를 만들면서 수용소의 명칭이 됐다. 이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비롯해 소련군 포로,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반나치주의자 등 30개 나라에서 강제로 끌려온 4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45년 1월 소련의 붉은 군대가 진격해 이곳을 해방시켰다. 올해로 2차 대전 종전 75주년을 맞았지만 수용소의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비극적인 참상을 생생히 증언한다.

반유대주의 펼치며 부상한 히틀러와 나치

유대인은 로마 시대 유다의 지명이었던 유대아(Judea)에서 유래됐다. 기원전 10세기경 이스라엘 왕국이 팔레스타인의 북쪽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 유다 왕국으로 갈라지고 결국 멸망하면서 유대인들이 세계 각지로 흩어진 디아스포라(Diaspora)가 발생했다. 1920년 설립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Nazi Party·나치)은 주요 정책으로 반유대주의를 채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패망한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떠안으며 사회 불만이 극에 달했다. 히틀러는 이를 유대인의 책임으로 몰아 독일에서 유대인의 권리는 점차 제한됐다. 1935년 9월 15일 유대인의 독일 국적을 박탈하고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뉘른베르크법이 제정됐다. 이 법에 따라 나치는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나치와 우파 정당인 가톨릭 중앙당 간 연립 정권에 의해 나치를 반대하는 언론인과 정치인들을 사법 절차 없이 구속하기 위한 최초의 강제수용소가 1933년 6월 독일 다하우에 개설됐다. 이곳의 기본적인 운영과 형태 등은 뒤이은 강제수용소들의 원형이 됐다.

2차 대전 발발, 이듬해 지어진 아우슈비츠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독소불가침 조약에 따라 그해 9월 17일 폴란드의 동부를 침공했다. 두 강대국의 연합으로 폴란드는 한 달도 안 돼 점령됐다. 나치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의 주동으로 나치에 저항하는 정치인과 지식인, 예술인 등을 수용하기 위해 폴란드 군대 막사를 포로수용소로 전환했다. 그렇게 고압 전류가 흐르는 울타리와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 등을 갖춘 아우슈비츠가 1940년 5월 20일 완공됐다. 그해 6월 14일 728명의 폴란드 정치범들을 시작으로 강제 수용이 본격화됐다. 제1수용소는 길이 1000m, 폭 400m인 22개의 벽돌 건물로 구성됐다. 수용 인원은 보통 1만5000명 전후였다.

독소전쟁 소련군 포로 수감 후 대량학살

독일은 소련과 발칸반도를 두고 입장이 엇갈리자 1941년 6월 22일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선전포고 없이 소련을 대규모로 침공해 독소전쟁(1941∼1945)을 벌였다. 전쟁 초기 대비가 안 돼 있던 소련에 승승장구한 독일은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을 잡아 아우슈비츠로 이송했다. 밀려드는 소련군 포로들로 공간이 부족하자 1941년 9월 3일 수용소의 11번 구역에서 650명의 소련군 포로와 250명의 폴란드 수용자를 대상으로 유독가스인 치클론B를 이용한 첫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나치는 소련군 포로를 더 많이 수용하기 위해 그해 10월 아우슈비츠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제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지어 이듬해 완공했다. 이곳에는 30만여 명이 수용됐는데 수용자들이 머무는 막사는 길이 35.4m, 폭 11m의 174개 건물로 각각 4㎡(1.21평) 남짓한 62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곳에서만 8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제3수용소인 모노위츠는 1941년 2월 IG-파르벤사가 화학공장을 설립하면서 강제 노역에 동원하는 수용소로 길이 270m, 폭 490m의 규모로 건설됐다.

1942년 폴란드에 헤움노, 마이다네크, 베우제츠, 소비버, 트레블링카 등 5곳의 대규모 수용소가 추가로 세워졌다. 나치는 폴란드 영토에 유대인 거주 지역인 게토(Ghetto·중세 이후의 유럽 각 지역에서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한 유대인 거주 지역, 소수자 집단이 밀집해서 거주하는 지구를 뜻하기도 함)를 설립해 1942년 7월 22일부터 가장 규모가 큰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을 추방했다.

추방당한 유대인들은 헝가리로 탈출했다. 헝가리는 1944년까지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았고, 독일과 같은 추축국(樞軸國·2차 대전 당시 연합국과 싸웠던 나라들이 형성한 국제동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틀러와 유대인 문제로 갈등을 빚은 헝가리의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물러나고 파시스트인 살러시 페렌츠가 집권하면서 헝가리에서만 80만 명의 유대인이 수용소로 강제 이송됐으며 절반 이상이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고 보호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전쟁이 격화하고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건립돼 독일군이 주둔한 이후 이탈리아 유대인들도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1945년 1월 해방, 7000여 명 살아남아

아우슈비츠는 나치와 함께 폴란드를 침공해 2차 대전을 벌인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다. 1944년 말 독소전쟁에서 소련군은 점차 우위를 점하며 독일로 향했고, 1945년 초 비스와 강과 오데르 강을 건너며 바르샤바까지 함락했다. 1945년 1월 17일 하인리히 힘러는 학살의 흔적을 지우고자 아우슈비츠 폐쇄 명령을 내렸다. 나치는 수용자들을 모두 이동시킨 뒤 수용소 시설을 파괴하려 했지만 이미 소련군이 가까이 왔기에 비르케나우와 모노위츠의 건물만 파괴했다. 그해 1월 27일 오후 3시쯤 소련의 붉은 군대 제60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했을 때, 7000여 명의 수용자들이 생존해 있었다. 비르케나우의 터와 제1수용소는 그대로 남아 학살의 증거가 됐다.

폴란드 정부는 나치가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고 끔찍한 만행을 벌인 아우슈비츠를 보존하기 위해 1947년 박물관으로 지정했으며,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독일에서는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1977년, 헬무트 콜 전 총리가 1989년과 1995년 두 차례 이곳을 방문해 나치가 벌인 과거사를 사죄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지난해 12월 6일 아우슈비츠에 헌화한 뒤 역사 보존을 위해 독일 정부가 6000만 유로(약 791억 원)를 기부한다고 밝혔다. 2005년 유엔은 매년 1월 27일을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일로 정했다.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한 날이다. 아우슈비츠는 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전쟁사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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