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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독립 열망, 전국 항일시위 불 붙이다

박영민

입력 2020. 01. 07   16:52
업데이트 2020. 01. 0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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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역사의 현장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1920년 조선 여학생 희롱사건 계기
11월 전국적 항일 시위로 확산
선진적 지식층이던 학생층
6·10 만세운동 등 주도
비밀결사 집중 결성되며 맹활약
항일민족운동 전개에도 큰 영향

 
학생운동 정신 기리기 위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참배실·전시실·기념탑 등 갖춰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학생독립운동기념탑. 진입 계단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개된 11월 3일을 상징하는 113개로 돼 있다. 사진=양동욱 기자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학생독립운동기념탑. 진입 계단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개된 11월 3일을 상징하는 113개로 돼 있다. 사진=양동욱 기자



비운의 황제 고종의 승하를 계기로 3·1 운동의 도도한 함성과 만세시위는 광주-전남의 산과 들에 메아리쳤고, 일제의 잔악무도한 침략을 뒤엎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10년 뒤 광주-전남의 저항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일제의 무자비한 식민정책에 저항해 전국을 뒤흔들었으니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 학생독립운동의 성전인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아 선열들의 항일정신을 본받자. 글=박영민/사진=양동욱 기자


19세기 의병들의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광주전남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광주독립운동기념탑.사진=양동욱 기자
19세기 의병들의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등 광주전남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광주독립운동기념탑.사진=양동욱 기자


  광주의 3·1 만세운동

광주의 3·1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0일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174일대)에 1000여 명이 모여 시작됐다. 양림동 쪽에서 개신교인들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北門通)에서 모여들었다. 지산면(芝山面) 쪽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이 몰려왔다.

시위 군중이 모여들자 숭일·수피아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시위 행렬이 서문통을 지나 현 광주우체국 앞을 돌아 충장로로 내려가서 충장로 파출소 앞에서 금남로로 들어섰다. 광주지방법원(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가 35 충장 서점)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위 행렬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무장 기마 헌병대가 출동해 100여 명을 체포했다.

만세시위는 다음 날에도 계속됐다. 3월 11일 오후 5시께 숭일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선두가 돼 3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했다. 3월 13일에는 광주읍 큰 장날을 이용,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계속했다. 3월 16일에는 송정면 송정리 정거장 앞 광장에서 보통학교 학생과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광주의 3·1 운동은 3월 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됐으며, 학생과 시민, 승려와 기독교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운동 기간 중 ‘조선독립광주신문’이 제작되기도 했고, 이후 담양·화순·곡성·영광 등의 3·1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뿐만 아니라 광주의 3·1 만세운동은 10년 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퍼지게 된다.

 대한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광주 남녀학생의 디오라마 모습.사진=양동욱 기자
대한독립을 주장하고 있는 광주 남녀학생의 디오라마 모습.사진=양동욱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의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작게는 광주전남 지역의 학생들이 일제의 폭압에 항거한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운동이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전개돼 갔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는 바로 ‘시작’이라는 점이다.

1920년대 초부터 서서히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조선 여학생 희롱사건이 불씨가 돼 11월 3일의 항일 시위가 펼쳐졌다. 그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갔으며, 학생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국민이 일제히 일본의 폭력에 대항하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의 숭고한 정신이 깨어나게 된 것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진 학생 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저항해 일어났던 대표적인 민족운동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규모나 영향, 역사적 의의에서 3·1 운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항일독립운동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단순히 광주 지역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충돌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학생, 농민, 노동자 등 민중세력들은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정책과 폭압 속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맹휴투쟁, 소작쟁의, 파업을 감행하면서 항일의식과 조직력을 키워나갔다. 이와 같은 민중의 항일운동 역량이 성숙해 학생 독립운동이 촉발됐다.

11월 3일의 학생 독립운동은 당시 사회의 선진적 지식인으로서 우세한 조직력과 패기로 민족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한 학생들이 핵심 역할을 했으며, 신간회, 조선청년총동맹, 조선학생전위동맹 등 사회·청년단체들이 가세해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국적인 항일민족운동으로 발전한 학생독립운동은 5개월 동안 지속했고, 각급 학교 5만4000여 명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해외에도 파급돼 만주의 간도와 길림성, 중국의 상하이와 베이징, 그리고 일본과 미주지역에서도 격려 집회와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후에도 학생 독립운동의 정신이 계승돼 각종 비밀결사 운동, 1940년대 강압적 징병과 공출에 대한 저항운동, 1943년 5월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돌아가신 선배 학생들의 얼과 혼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참배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진=양동욱 기자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돌아가신 선배 학생들의 얼과 혼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참배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진=양동욱 기자


왜 일어났는가?

일제의 식민지 경제정책은 조선의 경제구조를 수탈에 적합하게 재편하는 방향으로 추진됐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농업부문에서 단행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일제는 이를 통해 한말 이래 불법으로 침탈해 온 일본인의 토지 소유를 법적으로 인정해 주었고, 농토의 약 40%를 포함한 광대한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함으로써 일본 자본의 토지 침탈을 촉진했다. 또한, 임야 조사사업 등을 단행해 전 임야의 60%를 국유림으로 편입했으며, 농업정책 부문에서도 값싼 조선 쌀과 공업원료를 수탈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외에도 금융을 통제하고 허가제인 회사령을 내림으로써 민족기업의 성장을 억압했다. 이로써 민족자본가들은 큰 타격을 받아 영세적인 기업 경영에만 머물렀으며, 농민은 조상 전래의 토지를 빼앗기고 빈농·소작농으로 전락하고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등지로 이주하는 등 절박한 상황에 내몰렸다. 이처럼 일본의 경제 수탈정책은 우리에게 저항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게 된다.
 


이와 함께 일제 교육정책의 목표는 우리 민족을 영원히 말살하고 일본의 하등 국민으로 만들려는 데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인에게 고등교육은 되도록 회피시키고 초보적 지식과 일본어 습득 위주의 교육만 받게 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에 눈뜨지 못하도록 했으며 기능·기술을 숙련시키는 실업 및 기술 교육을 장려하여 최소한의 지식과 기술만을 갖추도록 조장했다.

그러나 사립학교, 종교 계통의 학교, 개량 서당, 강습소·야학 등이 소수이지만 민족의식 앙양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리고 많은 애국지사가 우리 민족 문화를 수호하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국어와 국사 연구 및 이에 대한 교육은 민족의 자각과 민족주체의식을 일깨우게 했다.

일제강점기 학생층은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지식층이었으며 노동자·농민 등 다른 사회계층보다 조직화하기 쉬웠기 때문에 항상 민족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했다. 그러므로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이었던 3·1 운동,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모두 학생층에 의해 주도됐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학생들은 식민지 차별 교육에 대해 민감하게 느끼고 불만을 가졌으며 사회경제적 피폐상을 겪으면서 일제 식민통치의 모순을 전체적으로 인식하게 됐다. 교육 차별과 식민지배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나아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 비밀결사인 독서회의 조직, 동맹휴학, 학생단체의 조직과 계몽운동 등을 감행하면서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계승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운동뿐만 아니라 전체 항일민족운동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29년 2월께만 하더라도 운동가들은 당시의 상황을 침체상태에 빠진 ‘퇴조기’로 파악하고 활동에 상당히 신중을 기했다.

그러나 1년 뒤인 1930년 봄, 이러한 상황인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해 상당수 운동가가 당시 상황을 ‘혁명적 시기’로 인식했는데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바로 1929년 10월 시작된 세계 대공황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세계 대공황을 자본주의 사회의 말기적 현상, 자본주의 몰락의 시초로 파악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3·1 운동 이후 최대의 사건, 혁명의 불 덮개를 처음으로 열어 놓은 역사적 계기로 보았다.

이 시기 학생 비밀결사는 1931년부터 1933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결성되는데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을 전후한 반전·반제투쟁과 무관하지 않았다. 각 비밀결사는 신문을 간행하거나 반전 격문을 살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신문사 주도의 농촌 계몽운동에도 많은 학생이 참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재판을 받거나 퇴학을 받은 학생들은 1930년대 초반부터 학생운동과 연관이 있거나 직접 청년·노동·농민운동에 뛰어들어 민족운동의 각 부문에서 활약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성전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어나 전국적으로 퍼졌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한 현충 시설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성전인 기념관 내에는 참배실, 전시실, 영상실을 갖추고 있으며 야외에는 학생독립운동기념탑과 원형무대 등이 있다.

1층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하다 돌아가신 선배 학생들의 얼과 혼을 기리기 위한 참배실이 자리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이다. 개관시간 동안 언제든 참배할 수 있으며, 선배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현재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다.

2층 전시실은 관람 동선을 번호 순서대로 하면 이해하기 좋다. 1번 광주학생독립운동이란 무엇인가, 2번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왜 일어났는가, 3번 어떻게 투쟁했는가, 4번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계승, 5번 영상실로 2층에 올라가서 왼쪽부터 관람하면 된다.

기념관 바깥으로 야외원형무대와 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있는데, 탑은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의 단결된 선열들의 의지를 상징화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개된 11월 3일을 상징하는 113개의 계단을 오르면 기념탑을 만날 수 있다. 기념탑의 평면 형태는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선열들의 의지를 상징화한 것이며 원경에서는 타오르는 횃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기념탑을 둘러싼 4개의 학생 동상을 보면서 광주 학생들의 결연한 의지를 다시 한 번 가슴속에 새길 수 있다.

자료 제공=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박영민 기자 < p1721@dema.mil.kr >
양동욱 기자 < bin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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