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삼국역사 통사적 서술로 일목요연하게 파악
고구려·백제·가야 왕릉 거의 멸실…신라 위주 집필
본지가 올해부터 기획시리즈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를 연재합니다. 한(韓)민족 5000년 역사 중 중고기(中古期)에 해당하는 삼국시대는 오늘날의 한반도에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가 국경을 나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왔던 열국(列國)시대이기도 합니다. 특히 삼국의 정립(鼎立) 속에 분권 왕정을 유지하며 사국시대를 지탱해온 건 가야국이기도 합니다. 집필을 맡은 이규원 작가는 세계일보 문화부장, 세계종교신문 주필을 역임했으며 한국기자상·한국출판문화상·부원문학상을 받은 시인이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고려시대 역사가들이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로 구분하는 국사 체계를 바로 세우지 않아 잃어버린 고구려 옛 영토 회복 명분을 영원히 상실하게 됐다.”
그는 “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발해사가 존재했다면 유능한 장군을 출전시켜 ‘발해는 옛 고구려 땅이다. 고구려를 승계한 고려에 왜 돌려주지 않는가?’라고 꾸짖은 뒤 그 땅을 거둬 왔으면 압록강 서쪽과 토문강 북쪽은 우리 영토가 됐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영재는 조선 후기 영조·정조시대의 실학자로, 『발해고』 외 여러 권의 역사 저술을 남긴 사학자다.
한민족의 역사는 유장하다. 단군왕검이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건국(B.C. 2333년)한 지 올해로 4353년(서기 2020년)째다. 그 역사적 행간을 이 땅에서 존재하다 명멸한 숱한 나라를 시대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단군조선(B.C. 2333~B.C. 1122, 1211년 존속) ▷기자조선(B.C. 1122~B.C. 194, 928년 존속) ▷위만조선(B.C. 194~B.C. 108, 86년 존속) ▷한사군·삼한·삼국시대(B.C. 108~A.D. 935, 1043년 존속) ▷고려(918~1392, 475년 존속) ▷조선(1392~1910, 519년 존속) ▷일제강점기(1910~1945, 35년 존속) ▷미·소 군정기(1945~1948, 3년 존속) ▷대한민국(1948~현재)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역사를 기산(起算)하면 햇수는 훨씬 소급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대한민국 또한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반만년 역사를 영위해 오는 동안 국가 주도세력은 수시로 교체됐고, 국경마저 국력의 성쇠에 따라 수없이 바뀌었다. 고대 국가인 고조선 당시만 해도 촌락이나 부족 집단이 소국가 형태를 이뤄 끊임없이 다투며 이합집산했다. 그 같은 다국가 형태의 극점을 이룬 게 바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군웅열국(群雄列國) 시대다.
삼국시대를 논함에 있어 가야도 신라·고구려·백제와 어깨를 겨룬, 대등한 비중의 나라다. 김수로왕이 서기 42년(신라 3대 유리왕 19년) 금관가야를 개국한 이래 562년까지 전·후기로 나눠 521년을 존속하며 서부 경남지역을 통치했던 연맹 국가다. 가야사는 기록으로 전하는 사료가 적어 역사학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다국가 시대를 종결짓고 통일국가 시대로 견인한 게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30대 문무왕 8년(668)으로 고구려는 28대 보장왕 27년이었다. 고구려가 차지했던 만주 일대가 아닌 대동강 이남의 강토였지만, 당시의 신라로서는 국체를 지켜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후 고구려 유장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699)하며 228년간 고구려 옛 땅을 다스렸지만, 926년 거란에 멸망하기까지의 역사가 불분명하다. 유득공이 탄식한 대목이다.
이처럼 한반도의 역사는 고대로 올라갈수록 미궁에 빠지고 만다. 당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사료적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한국사 영역은 고려 중·후기에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존해 왔다. 오히려 중국 변방 역사서에 우리 고대사의 언급이 잦아 곧잘 인용되기도 한다. 왜 우리 선조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집필하며 인용했던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가락국기』 『화랑세기』 등 소중한 역사서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못했을까.
하지만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추적하고 규명하는 데 좌절할 일만도 아니다. 바로 그 당시를 살다 간 임금들이 묻힌 왕릉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1971년 공주 백제 무령왕릉과 1973년 경주 천마총이 발굴돼 공개될 당시의 흥분과 환호를 잊지 못한다. 발굴 유물을 통해 1500여 년 전의 왕실 문화와 생활·시대상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세계 고고학계와 문화계도 한국의 찬란한 고대 문화에 경악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왕릉 조영(造營)은 장묘문화의 정수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경주·공주·부여·김해 등 각지에 왕릉으로 비정(比定)되는 거대한 무덤들이 많다. 남한 소재 조선왕릉 40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왕릉의 역사와 문화 속에 인류 문명의 공감대가 담겨 있다는 국제적 가치를 인증받은 것이다. 북한과 만주 지역에도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소수 있다.
신라는 B.C. 57년 박혁거세가 나라를 건국한 이래 56명의 왕이 992년 동안 왕권을 유지했다. 박·석·김 세 성씨가 왕위를 번갈아 이어오긴 했지만, 세계 왕조사에도 드문 천년 왕국이었다. 따라서 신라사는 고구려·백제·가야를 포함한 4국의 역사까지 아우르게 된다.
신라 임금 56명 중 묘호(廟號·사후 임금에게 붙이는 시호)가 비정된 왕릉 수는 37기에 이른다. 36기가 경주에 있고 1기(56대 경순왕)는 경기도 연천에 있다. 이 밖에도 경주에는 발굴만 하면 임금의 실체가 밝혀질 수 있을 왕릉 규모의 무덤 수십 기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가야 왕릉은 거의 멸실돼 2~3기만 전해올 뿐이다. 필자가 신라 역사를 중심으로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를 집필하려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옛날 한반도에서도 나라와 나라 사이 국경은 넓은 강과 높은 산을 중심 삼고 구획 지어졌다. 특히 이 땅의 허리에 해당하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결국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했다. 일찍이 낙동강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고, 삼국통일 후 대동강은 신라와 당나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중국 대륙의 고대 국가들도 그러했다. 오늘날에도 압록강은 중국과, 두만강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역사를 기술하는 데 동시대를 살아보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시대 사서(史書)를 저본(底本) 삼아 후일에 쓰인 방계 서적을 섭렵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역사서는 방대한 삼국역사를 따로따로 써 이해가 더뎠고 읽는 불편도 뒤따랐다. 이번 연재 기사에서는 통사적(通史的) 서술 기법을 활용해 한 지면에서 삼국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집필하려고 한다. 여기에다 신라 초기의 자생 풍수와 통일신라 이후 성행한 왕릉 풍수까지 쉽게 풀어내 읽는 재미를 더할 것이다.
역사를 깊이 천착하다 보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힘이 국가 운명을 좌우한다는 신비함을 느끼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고 문명은 이동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엄혹하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백제요서경략은 무엇이며, 한·일 양국이 고대사 해석에서 대립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도 가야 왕국이 전개한 외교적 수완의 관점에서 조명해낼 것이다.
방대한 삼국역사 통사적 서술로 일목요연하게 파악
고구려·백제·가야 왕릉 거의 멸실…신라 위주 집필
본지가 올해부터 기획시리즈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를 연재합니다. 한(韓)민족 5000년 역사 중 중고기(中古期)에 해당하는 삼국시대는 오늘날의 한반도에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가 국경을 나눠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왔던 열국(列國)시대이기도 합니다. 특히 삼국의 정립(鼎立) 속에 분권 왕정을 유지하며 사국시대를 지탱해온 건 가야국이기도 합니다. 집필을 맡은 이규원 작가는 세계일보 문화부장, 세계종교신문 주필을 역임했으며 한국기자상·한국출판문화상·부원문학상을 받은 시인이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고려시대 역사가들이 통일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로 구분하는 국사 체계를 바로 세우지 않아 잃어버린 고구려 옛 영토 회복 명분을 영원히 상실하게 됐다.”
그는 “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발해사가 존재했다면 유능한 장군을 출전시켜 ‘발해는 옛 고구려 땅이다. 고구려를 승계한 고려에 왜 돌려주지 않는가?’라고 꾸짖은 뒤 그 땅을 거둬 왔으면 압록강 서쪽과 토문강 북쪽은 우리 영토가 됐을 것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영재는 조선 후기 영조·정조시대의 실학자로, 『발해고』 외 여러 권의 역사 저술을 남긴 사학자다.
한민족의 역사는 유장하다. 단군왕검이 아사달(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건국(B.C. 2333년)한 지 올해로 4353년(서기 2020년)째다. 그 역사적 행간을 이 땅에서 존재하다 명멸한 숱한 나라를 시대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단군조선(B.C. 2333~B.C. 1122, 1211년 존속) ▷기자조선(B.C. 1122~B.C. 194, 928년 존속) ▷위만조선(B.C. 194~B.C. 108, 86년 존속) ▷한사군·삼한·삼국시대(B.C. 108~A.D. 935, 1043년 존속) ▷고려(918~1392, 475년 존속) ▷조선(1392~1910, 519년 존속) ▷일제강점기(1910~1945, 35년 존속) ▷미·소 군정기(1945~1948, 3년 존속) ▷대한민국(1948~현재)이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로부터 대한민국 역사를 기산(起算)하면 햇수는 훨씬 소급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의 역사가 그러하듯이 대한민국 또한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반만년 역사를 영위해 오는 동안 국가 주도세력은 수시로 교체됐고, 국경마저 국력의 성쇠에 따라 수없이 바뀌었다. 고대 국가인 고조선 당시만 해도 촌락이나 부족 집단이 소국가 형태를 이뤄 끊임없이 다투며 이합집산했다. 그 같은 다국가 형태의 극점을 이룬 게 바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군웅열국(群雄列國) 시대다.
삼국시대를 논함에 있어 가야도 신라·고구려·백제와 어깨를 겨룬, 대등한 비중의 나라다. 김수로왕이 서기 42년(신라 3대 유리왕 19년) 금관가야를 개국한 이래 562년까지 전·후기로 나눠 521년을 존속하며 서부 경남지역을 통치했던 연맹 국가다. 가야사는 기록으로 전하는 사료가 적어 역사학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다국가 시대를 종결짓고 통일국가 시대로 견인한 게 신라의 삼국통일이다. 30대 문무왕 8년(668)으로 고구려는 28대 보장왕 27년이었다. 고구려가 차지했던 만주 일대가 아닌 대동강 이남의 강토였지만, 당시의 신라로서는 국체를 지켜내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후 고구려 유장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699)하며 228년간 고구려 옛 땅을 다스렸지만, 926년 거란에 멸망하기까지의 역사가 불분명하다. 유득공이 탄식한 대목이다.
이처럼 한반도의 역사는 고대로 올라갈수록 미궁에 빠지고 만다. 당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사료적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한국사 영역은 고려 중·후기에 쓰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존해 왔다. 오히려 중국 변방 역사서에 우리 고대사의 언급이 잦아 곧잘 인용되기도 한다. 왜 우리 선조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집필하며 인용했던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가락국기』 『화랑세기』 등 소중한 역사서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못했을까.
하지만 우리 고대사를 새롭게 추적하고 규명하는 데 좌절할 일만도 아니다. 바로 그 당시를 살다 간 임금들이 묻힌 왕릉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1971년 공주 백제 무령왕릉과 1973년 경주 천마총이 발굴돼 공개될 당시의 흥분과 환호를 잊지 못한다. 발굴 유물을 통해 1500여 년 전의 왕실 문화와 생활·시대상이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세계 고고학계와 문화계도 한국의 찬란한 고대 문화에 경악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왕릉 조영(造營)은 장묘문화의 정수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경주·공주·부여·김해 등 각지에 왕릉으로 비정(比定)되는 거대한 무덤들이 많다. 남한 소재 조선왕릉 40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왕릉의 역사와 문화 속에 인류 문명의 공감대가 담겨 있다는 국제적 가치를 인증받은 것이다. 북한과 만주 지역에도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들이 소수 있다.
신라는 B.C. 57년 박혁거세가 나라를 건국한 이래 56명의 왕이 992년 동안 왕권을 유지했다. 박·석·김 세 성씨가 왕위를 번갈아 이어오긴 했지만, 세계 왕조사에도 드문 천년 왕국이었다. 따라서 신라사는 고구려·백제·가야를 포함한 4국의 역사까지 아우르게 된다.
신라 임금 56명 중 묘호(廟號·사후 임금에게 붙이는 시호)가 비정된 왕릉 수는 37기에 이른다. 36기가 경주에 있고 1기(56대 경순왕)는 경기도 연천에 있다. 이 밖에도 경주에는 발굴만 하면 임금의 실체가 밝혀질 수 있을 왕릉 규모의 무덤 수십 기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가야 왕릉은 거의 멸실돼 2~3기만 전해올 뿐이다. 필자가 신라 역사를 중심으로 ‘왕릉으로 읽는 삼국역사’를 집필하려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옛날 한반도에서도 나라와 나라 사이 국경은 넓은 강과 높은 산을 중심 삼고 구획 지어졌다. 특히 이 땅의 허리에 해당하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는 나라가 결국 한반도의 패권을 장악했다. 일찍이 낙동강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고, 삼국통일 후 대동강은 신라와 당나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중국 대륙의 고대 국가들도 그러했다. 오늘날에도 압록강은 중국과, 두만강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역사를 기술하는 데 동시대를 살아보고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시대 사서(史書)를 저본(底本) 삼아 후일에 쓰인 방계 서적을 섭렵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역사서는 방대한 삼국역사를 따로따로 써 이해가 더뎠고 읽는 불편도 뒤따랐다. 이번 연재 기사에서는 통사적(通史的) 서술 기법을 활용해 한 지면에서 삼국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집필하려고 한다. 여기에다 신라 초기의 자생 풍수와 통일신라 이후 성행한 왕릉 풍수까지 쉽게 풀어내 읽는 재미를 더할 것이다.
역사를 깊이 천착하다 보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의 힘이 국가 운명을 좌우한다는 신비함을 느끼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고 문명은 이동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엄혹하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백제요서경략은 무엇이며, 한·일 양국이 고대사 해석에서 대립하고 있는 임나일본부설도 가야 왕국이 전개한 외교적 수완의 관점에서 조명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