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작가는 중개자…작품 정의는 보는 이 해석의 몫

입력 2019. 12. 11   17:29
업데이트 2019. 12. 11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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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네오 다다 - 이벤트, 해프닝, 행위예술, 아상블라주, 환경조각, 컴바인 페인팅, 신사실주의, 펑크아트, 이코노클래즘


소비문화에 경의와 조롱…비판적 사고 권장
냉전 분위기 거스르지 않는 은밀한 전략 취해
새로운 현대 미술 운동 기초가 된 네오다다이스트
콜라주·퍼포먼스 등 여러 방법으로 미술 경계 넓혀
라우센버그·케이지·커닝햄 등 대표 작가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1955~1959 ,혼합재료, 106.7x160.7x163.8㎝, 스톡홀름미술관.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1955~1959 ,혼합재료, 106.7x160.7x163.8㎝, 스톡홀름미술관.
키엔홀츠, 포터블 전쟁기념비, 1968, 혼합재료, 289.6x975.4x243.8㎝, 독일 루트비히미술관.
키엔홀츠, 포터블 전쟁기념비, 1968, 혼합재료, 289.6x975.4x243.8㎝, 독일 루트비히미술관.

인류사에 없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동맹국이었던 소련과 미국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중심국으로 갈라섰다. 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 사이에 매우 긴장된 적대관계가 형성, 유지되는 냉전시대(Cold War)를 맞는다. 군사적인 전쟁은 없었지만 미국과 소련은 동유럽의 정치체제와 원자력 관리 등을 두고 대립했다. 미국은 1948년 서유럽 원조 부흥계획인 마셜 계획을 시행하고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결성했다. 소련도 바르샤바 조약기구(Warsaw Treaty Organization)를 창설해 서로 대립했고 위성을 쏘아 올리는 등 우주에서까지 경쟁하면서 냉전은 극에 달했다.

이런 냉전 상황은 미국에서 반공산주의적인 정서를 강화시켰고, 전후 약 15년 동안 미국은 전례 없는 고도성장을 이룩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가 됐다. 사회적으로는 다소 획일적인 문화가 주를 이루었고 국가와 사회에 순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민권운동이 일어나 인종차별이 위헌이란 판결이 나오면서 개인의 자유와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후 냉전 시대의 국가주의적인 규율과 질서가 일상이던 시절,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 1922~1922),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1919~2009)에 의해 변화가 시작됐다. 케이지는 이들과 함께 1952년 노스캐롤라이나의 블랙마운틴 대학(Black Mountain College)에서 ‘더 이벤트(The Event)’라는 ‘해프닝(Happening)’, 즉 행위예술을 펼치는 개념적인 퍼포먼스 형태로 자신들을 표현했다.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1955~1959 ,혼합재료, 106.7x160.7x163.8㎝, 스톡홀름미술관.
라우센버그, 모노그램, 1955~1959 ,혼합재료, 106.7x160.7x163.8㎝, 스톡홀름미술관.



이 퍼포먼스는 기회와 개성, 관객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여러 매체가 모두 하나의 작업으로 결합된 것에 대한 운동의 관심사를 요약해 담아냈다. 다다이즘의 공격적이며 호전적인 스타일과 달리 냉전의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는 은밀한 전략을 통해 새로운 도발을 시도한 것이다.

이들은 소비문화에 대한 경의와 조롱, 추상화와 리얼리즘 등 상반된 개념의 통합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통적인 미적 기준을 넘어서 모순과 부조리한 배열, 서사와 기타 혼합된 신호에 의해 생성된 비판적 사고의 과정을 통해 의미를 해석하도록 권장했다. 즉 가장 중요한 예술에 대한 태도는 ‘창작자의 의도보다 작품을 정의하는 것은 관람객의 해석’이며 이 과정에서 작가는 중개자라는 뒤샹의 가르침을 따랐다.

당시 케이지는 창조자의 역할과 예술의 창조성에 대해 선불교와 같은 동양 철학을 통해 강의했다. 이 수업을 들은 라우센버그는 자동차 타이어를 종이 위에 굴려 그 자국을 작품으로 만들거나 캔버스를 순수한 흰색으로 칠해 주변 환경을 주요 주제로 반영하는 등 전통적이지 않은 예술적 과정을 중시했다. 커닝햄은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자연적 능력과 동물적 본능을 공연예술과 춤을 조합하거나, 고전 발레와 현대 무용을 종합해 네오 다다를 미학적으로 정의하고자 했다. 이후 이들은 뉴욕으로 이주해 예술가의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는 이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켰다.

‘네오 다다’라는 용어는 1957년 미술평론가 로버트 로젠블럼(Robert Rosenblum, 1927~2006)에 의해 처음 사용됐고 그 다음해 미술잡지 아트뉴스(ARTnews)의 토머스 B.헤스(Thomas B. Hess,1920~1978), 그 후 1962년에는 비평가이자 미술사학자인 바버라 로즈(Barbara Rose,1938~ )가 네오 다다를 매우 광범위한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팝아트에 자리를 내준다. 하지만 네오 다다는 다다 이후 잊혀진 이론적 틀을 되살려 그 이후 등장하는 많은 새로운 현대 미술 운동의 기초가 됐다. 다다이스트들이 부르주아 문화에 대해 공격을 서슴지 않았지만 네오 다다이스트들은 콜라주와 퍼포먼스, 우연성을 무기로 다양한 방법과 매체를 사용해 미술의 경계를 넓히려 했다.

10여 년간 뉴욕 화단을 지배해 온 추상표현주의는 서서히 네오 다다에 자리를 내줘야 했다. 라우센버그와 케이지, 커닝햄 외에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와 앨런 캐프로(Allan Kaprow, 1927~2006)도 모두 네오 다다에 중요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네오 다다를 지향했지만 독창적인 기법과 양식을 통해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밀도를 높여나갔다.

특히 라우센버그는 결합을 의미하는 3차원 회화인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을 고안해 냈다. 그는 소비가 미덕이던 당시 미국 문명의 폐기물 즉 만화, 콜라병, 종이, 나무, 고무, 금속, 천은 물론 박제된 동물이나 작동하는 라디오, 선풍기, 전구 등 일상의 오브제를 사용하는 대담한 부조 또는 조각에 가까운 회화적 스타일을 시도했다. 그는 뒤샹이나 슈비터즈, 조셉 코넬(Joseph Cornell,1903~1972)의 회화에 대한 질문에 나름의 답으로 컴바인 페인팅을 내놓았다. 1960년대 후반까지 지속한 이런 유의 작품으로 그는 실제 삶을 미술 속에 끌어들여 미술의 경계를 가장 명확하게 재정의한 작가로 남았다. 그의 이런 유형의 작업은 아상블라주(Assmblage)로 연결된다.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가 나비 날개를 붙이는 콜라주 기법을 ‘자국(d’ empreintes)’이라 칭했다. 이런 작업은 뒤샹이나 피카소, 타틀린과 칼더(Alexander Calder, 1898~1976)를 거쳐 1930년대 루이즈 네벨슨(Louise Nevelson, 1899~1988) 그리고 1950~1960년대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로 이어진다.

재스퍼 존스는 1958년 첫 개인전을 통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들을 활용해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과녁과 깃발, 문자와 숫자 같은 ‘마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작업하면서 잘 알려진 기호의 가독성과 판독 가능성의 불일치를 통해 기호의 폭력성을 드러냈다. 그는 익숙한 것을 작품으로 발표하면서 현대인의 일상 속 대중 매체의 침투에 대해 비판하고 일상의 주변을 추상화했다.

뉴욕에서 잡다한 일상용품이나 폐품들을 끌어모아 3차원적 회화를 시도할 즈음 서부 해안 캘리포니아에서는 에드워드 키엔홀츠(Edward Kienholz, 1927~1994) 같은 작가들이 이와 유사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들의 작업은 ‘보잘것없고, 가치 없는 사람’을 일컫는 ‘펑크(Funk)’라는 단어를 차용해 펑크아트라 불렀다. 이후 1967년 사이츠(William G. Seitz, 1914~1974)가 펑크아트 전시를 열면서 일반화했다.

사실 펑크라는 단어는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경멸과 조롱 그리고 외설적인 빈정거림 같은 의미로 마치 ‘우상파괴’를 뜻하는 현대판 이코노클래즘(Iconoclasm)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1960년대 미국미술이 ‘차가운’ 경향이었던 데 비해 펑크아트는 재료에 있어서 반기능적이며 뜨겁고, 미학에서는 반지성적·반형식적인 입장을 취했다. 또 인간을 다루지만 그 인간상은 뒤틀리고 통속적인 이미지다. 따라서 네오 다다란 용어는 이후 케이지나 캐프로보다는 존스와 라우센버그의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가 됐고 이후 하위문화를 소재로 예술과 일상 간의 틈에서 활동했던 네오 다다는 팝아트를 세상에 불러내게 된다.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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