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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병영칼럼] 서촌과 윤동주

입력 2019. 12. 04   17:19
업데이트 2019. 12. 04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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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서촌은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요즘엔 세종마을로 불리기도 하지만, 서촌은 북촌과 함께 경복궁 좌우를 일컫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인왕산 아래 골목골목 들어선 개량 한옥들이 소박한 정취를 빚어낸다. 서촌은 조선시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이었던 중인들의 생활공간이었다. 서촌에는 독립운동의 흔적과 함께 문학인들의 공간도 함께 걸을 수 있어 바쁜 현대인들에게 조금은 느리면서 옛것을 즐길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겨울의 스산함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나와 광화문으로 향했다. 광화문을 지나 왼쪽을 보니 바위산 인왕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이 인왕산을 보면서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강희언의 ‘인왕산도’를 떠올릴 것이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비 온 뒤의 인왕산을 묘사한 것으로 진경산수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래서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한 것이 아닌가. 국보이긴 하지만 한 기업가의 개인 소유로 있는 것이기도 한 ‘인왕제색도’와 ‘인왕산도’를 그리면서 시간을 머금고 있는 한국 문화재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봤다. 경복궁에서 인왕산을 카메라에 담고 통인시장을 지나 수성동 계곡으로 향했다.

수성동 계곡 입구에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등산객과 주말을 즐기려는 연인·가족들이 모여 있다. 마을버스 9번 버스 종점에는 버스기사 몇 분이 커피를 마시면서 다음 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앞에는 15m 정도 높이의 200년 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깊게 뿌리를 박고 서 있다. 밑동부터 1m 위에서 두 갈래의 큰 기둥으로 갈라진 느티나무는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20m 정도 내려오면 오른쪽에 서촌재가 눈에 띈다. 돌산에 자신을 맡긴 채 절묘하게 붙어 있는 서촌재는 인간의 환경 적응력의 척도(尺度)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바로 누상동이다. 옛 골목의 정취는 찾을 수 없지만, 색다른 커피숍 등이 새로 들어서 있어 꽤 걸을 만한 곳이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벽에 태극기를 붙인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용정에서 태어나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차디차게 죽어갔던 윤동주가 서울에서 학업에 전념할 때 머문 하숙집이다.

이 집은 그가 서울에서 학업에 전념하면서 머물렀던 곳이다. 집의 형태는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이곳이 윤동주가 70여 년 전에 생활했던 집이구나 할 정도의 기념동판이 붙어 있을 뿐이다. 일본 교토에 가면 윤동주 하숙집에도 기념동판이 붙어 있다. 아마 하숙집마다 표지를 붙여 놓은 것은 윤동주가 유일하지 않을까. 독립운동가 가운데서 말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집 왼쪽에 태극기와 함께 이곳이 윤동주의 거처였음을 알리는 기념동판에는 윤동주의 행적에 대해 묘사하면서 ‘요절(夭折)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요절했다’는 표현은 문학청년의 천재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부족함이 없지만,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순국(殉國)’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그가 문학청년이든 독립운동가이든 우리의 고귀한 역사적 자산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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