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대공황·파시즘 강타… 추상에서 현실로 눈 돌려

입력 2019. 11. 27   17:11
업데이트 2019. 11. 2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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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리얼리즘 - 사회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동파, 8인회, 애시캔파, 대공황, 파시즘, 뉴딜정책, 벽화운동, 인민성, 계급성, 당파성, 혁명적 낭만주의

 
사회 변혁 이데올로기 결합해 등장
사회적 리얼리즘 뉴딜정책 혜택
가장 미국적 미술운동 자리 잡아
에드워드 호퍼·하트 벤튼 등 대표 화가

 
소비에트 연방 공식 실천적 미학
사회주의 모든 국가 미술 양식 채택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사진=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사진=시카고아트인스티튜트
       
사실주의를 영어로 표기하면 리얼리즘(Realism)이다. 하지만 미술사의 리얼리즘과 사실주의는 같지만 다르다. 사실주의는 이미 정치와 경제의 양대 혁명인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물로 탄생했다.

‘당대 사회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19세기의 근대 리얼리즘을 우리는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라고 한다. 20세기에 등장하는 사회적 변혁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리얼리즘, 즉 ‘사회적 리얼리즘(Social Realism)’과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 또는 변증법적 리얼리즘은 대개 19세기 사실주의와 구분하기 위해 ‘리얼리즘’이라고 표기한다.

19세기 사실주의는 당대 사회, 특히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도시 빈곤층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거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반영했다. 사실주의는 1870년대 영국의 루크 필즈(1843~1927), 헤르코머(1849~1914), 프랭크 홀(1845~1888), 윌리엄 스몰(1843~1931) 같은 화가들이 선도했다. 러시아에서는 ‘사악한 차르 시대’가 이동파(Peredvizhniki) 화가들의 사회적 리얼리즘을 낳았다. 레핀(1844~1930)에 의하면 이는 ‘사악한 사회의 모든 괴물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거대한 산업·경제·사회 및 문화적 변화를 경험한 미국의 초기 사회적 리얼리즘은 미국의 성장과 번영, 문화적 풍요를 노래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상의 현실적인 인물을 통해 20세기 초반 뉴욕시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들은 5번가를 주름잡는 부유층보다는 사회적 하층인 이민자들의 삶을 주목해 뒷골목이나 연립주택, 빈민가, 술집 등을 주로 그렸다.

그 중심에는 1908년 뉴욕의 로버트 헨리(1865~ 1929)를 중심으로 구성된 ‘8인회(The Eight)’가 있었다. 8인회는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상징주의와 추상미술 대신 뉴욕의 변두리와 서민들의 삶을 묘사하고자 했다. 이들을 경멸하는 일부는 이들을 ‘깡통 재떨이’를 의미하는 애시캔 파(Ash Can School)라고 불렀다. 구성원으로는 헨리와 조지 럭스(1867~1933), 로손(1873~1939), 글락켄(1870~1938), 신(1876~1953), 프렌더게스트(1858~1924) 등이 있었다. 이들은 그림은 물론 삽화와 에칭 및 석판화를 매개로 뉴욕의 이민과 도시빈곤 등 ‘자신감과 의심, 흥분과 떨림으로 표시되는 불안하고 전환적인 시간’을 기록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우아한 승리’.  사진=푸시킨미술관
디에고 리베라의 ‘우아한 승리’. 사진=푸시킨미술관


루스벨트 뉴딜 정책 일환 다양한 예술분야 투자 지원

초기 유럽의 사실주의에 뿌리를 둔 사회적 리얼리즘 작가들은 대공황과 유럽에서 등장한 파시즘(Fascism)이라는 두 대형사건을 겪으며 추상에서 현실로 눈을 돌렸다. 이들은 미국 농민들의 삶과 도시노동자, 빈민과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을 조망하면서 더 의식 있고 비판적인 사회적인 리얼리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호황을 맞았던 미국 경제는 곧 과잉생산으로 인한 가격 하락과 기후 급변, 기계화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1929년 주식시장은 폭락해 시가 총액이 40%나 증발하면서 전 세계를 공황의 늪으로 빨아들였다. 1933년이 되자 기업과 공장들은 문을 닫았고 은행들도 파산했다. 많은 농장 노동자들은 일을 잃었고 소규모 농사업자는 부채에 허덕였으며 농토는 빚 대신 압류됐다. 농부들의 소득도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고 시가 총액은 1929년의 5분의 1로 줄었다. 1932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약 200만 농가가 빈곤에 허덕였고, 수백만 에이커의 농지가 토양 침식과 열악한 농업으로 피폐화된 상태였다. 미국인 4명 중 1명이 실업자였다.

당시 주요 구호 기관이었던 취로 사업청(WPA)은 이를 극복하고자 도입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단순한 복지 혜택보다 많은 건물과 도로, 공항 및 학교 등 사회간접자본(SOC)을 세워 일자리를 창출해 나갔다. 또 연방 극장 프로젝트, 연방 예술 프로젝트와 연방 작가 프로젝트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투자를 통해 많은 배우, 화가, 음악가와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이런 지원 활동에 힘입어 미술 분야에서도 5000개 이상의 일자리가 만들어졌고, 미국인을 위한 22만5000개 이상의 작품이 제작됐다. 농촌의 빈곤 퇴치를 위해 설립된 농장보안관리(FSA) 프로그램은 활동의 시각적 증거를 남기기 위해 사진가를 고용했다. 이때 제작된 8만 점에 달하는 사진은 시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결정체이자 사회적 리얼리즘 사진의 보고가 됐다.

이렇게 사회적 리얼리즘은 대공황과 뉴딜 정책의 혜택을 입어 가장 미국적인 미술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이때 혜택을 입으며 사회적 리얼리즘 또는 미국적 리얼리즘(American Realism)의 중심에 선 화가로 에드워드 호퍼(1882~1967)와 토머스 하트 벤튼(1889~1975), 윌 바넷(1911~2012), 벤 샨(1898~1969), 그랜트 우드(1892~1942), 와이어스(1917~2009)가 있다. 또 워커 에번스(1903~1975), 에드워드 스타이켄(1879~1973), 도로시아 랭(1895~1965) 등 많은 사진작가들도 있다.

이런 움직임은 1920~1930년대에 걸쳐 멕시코에서 벽화운동으로 나타났다. 사회적 리얼리즘의 큰 흐름 중 하나를 차지하는 멕시코 벽화운동은 대체로 정치적인 경향이 강했다. 이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Marxism)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1910년 시작된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의 정치·사회적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이 운동에는 디에고 리베라(1886~1957), 시케이로스(1896~1974), 오로즈코(1983~1949)와 타마요(1899~1991) 등이 중심에 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인민성·계급성·당파성’을 기본 축으로

사회적 리얼리즘 화가들과는 달리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은 공통점이 일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사회적 리얼리즘은 공식적으로 정부나 기관이 주도하는 예술이 아니며 작가들의 주관에 바탕을 둔 자율적인 공간과 지점을 허용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시작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공식적인 미술 양식으로 자리한 이상화된 리얼리즘 스타일의 양식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기존의 리얼리즘과 달리 ‘인민성’ ‘계급성’ ‘당파성’ 그리고 ‘혁명적 낭만주의’를 기본 축으로 한다.

1932년 9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작가협회(RAPP)’가 해산되면서 새로운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방향이 설정됐다. 1934년 열린 소련작가동맹 제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기본적인 창작 방법으로 채택됐다. 소련작가동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예술가들에게 현실을 혁명의 발전과정 속에서 진실하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묘사할 것을 요구한다. 현실 묘사의 진실성과 역사적 구체성은 노동자를 사회주의정신에 따라 사상적으로 개조하고 교육하는 과제와 부합해야 한다’고 정의했다. 이는 1960년대 후반까지 국가로부터 승인받은 지배적이며 공식적인 실천적 미학이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하기까지는 말이다. >/사진=필자 제공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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