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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디자인 재결합…예술과 산업 융복합 이끌어

기사입력 2019. 11. 06   17:31 최종수정 2019. 11. 06   17:36

<38> 바우하우스-아르누보, 유겐트스틸, 분리주의, 미니멀리즘, 시각예술, 공작교육, 형태교육

1919년 독일서 설립된 조형학교
독창적 수업 방식·커리큘럼 큰 반향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된 후에도
유럽과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현대 미술·디자인 분야 리드

 
예술 영혼 깃든 실용적인 물건 창조
창작과정 과학처럼 새롭게 개념화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우하우스 전화기’.

그로피우스의 데사우 바우하우스.

조셉 알버스의 ‘사각형에 대한 경의’. 
 사진=필자 제공


  

올해로 100년이 됐다. 현대건축과 미술, 삶과 예술을 통합해 모더니즘을 실천에 옮긴 바우하우스(Bauhaus)는 1919년 독일이 군주제를 청산하고 세운 공화제의 바이마르공화국에 설립됐다.

이후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예술학교로 1933년 나치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비록 13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술과 사회, 기술에 대한 교육과 그 새로운 접근 방식은 향후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우하우스는 영국의 아트 앤 크래프트(Art & Craft) 운동과 아르누보(Art Nouveau), 그리고 유겐트스틸(Jugendstil), 빈의 분리주의(Secession)를 포함해서 순수예술과 응용예술의 결합을 통해 이 둘의 평준화를 도모할 뿐만 아니라 창의성과 산업·제조기술을 결합해 새로운 삶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다.

사실 초기 바우하우스는 독일의 전통적이고 낭만적인 중세 길드조직을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1920년대 이후 예술과 산업의 융복합이라는 명제에 매달리면서 바우하우스는 매우 독창적인 동시에 중요한 성과를 낳게 된다.

특히 아주 독특한 커리큘럼과 독창적인 교수법을 지닌 독보적인 교수들은 바우하우스가 폐교된 후에도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현대 미술과 디자인, 산업을 이끌어 갈 혁혁한 기록과 인재를 양성했다.

20세기 초 바우하우스는 현대산업이 양산하는 제품들의 비루함·비천함을 인식하고 전후 불안한 시대에 예술성이 박탈된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제품들에 대한 두려움마저 느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미술과 기능적 디자인을 재결합해 예술 작품의 영혼이 깃든 실용적인 물건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바우하우스는 여러 가지 방식의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포기하고, 주제를 지적·이론적으로 해석하며 접근해 나갔다.

이에 따라 예술과 디자인의 다양한 측면들은 융합되고, 르네상스 시대에 정착된 예술의 계층 구조가 평준화됐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조각과 그림 같은 순수미술의 하위개념처럼 평가받던 공예, 건축, 인테리어 디자인, 직물 및 목공예를 같은 반열에 뒀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순수미술이 아닌 기능적인 공예와 실용적인 산업디자인에 가장 영향력 있고 지속적인 족적을 남겼다. 특히 마르셀 브로이어(1902~1981), 마리안 브란트(1893~1983) 등은 가구와 생활용품 디자인 분야에서 1950~1960년대에 이미 세련된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초석을 닦았다.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와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 같은 건축가는 반듯하고 매끄러운 기능주의 건축을 이끌었다. 이들은 각종 문제나 실험을 ‘미술’이 아닌 ‘시각예술’이란 관점에서 봤으며, 창작의 과정을 역사나 문학 같은 인문학보다 과학처럼 새롭게 개념화했다.

‘집을 짓는다’는 의미의 ‘Haus Bau’라는 말을 치환해서 바우하우스라 명명한 이 새로운 개념의 조형학교는 1919년 바이마르에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에 의해 설립됐다. 1915년 처음으로 작센공예미술학교를 인수한 그는 4년 후 바이마르 미술아카데미와 합병해 급진적이면서 새로운 디자인 학교를 세웠다. 그는 개념적인 측면에서 창조적인 기계화, 교육개혁, 고급 및 응용 예술의 재결합과 함께 러시아 구성주의를 즉각적이며 스타일리시한 방식으로 적절하게 사용해 1910년대 바우하우스의 기술과 예술의 병합이란 테제를 실천하는 데 차용했다.

물론 바우하우스는 개교 당시 아르누보 스타일에 기반을 뒀지만 그로피우스는 학교에 공예와 실용미술을 존중할 것과 중세시대의 섬세하고 장인정신에 빛나는 수공예적 태도로 복귀할 것을 제안했다. 아무튼 바우하우스는 미술은 물론 오늘날의 산업, 그래픽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인테리어 디자인과 건축 등 모든 예술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차별점은 수업 내용이 아니라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의 새로움에 있었으며 그 바탕은 장인정신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커리큘럼은 매우 독창적이었다. 처음 6개월은 예비 또는 ‘기본 코스’를 수료해야 했다. 요하네스 이텐(1888~1967)이 강의를 맡은 기본 코스의 주 내용은 디자인의 기본이었다. 그는 촉감과 공간감, 구성의 감각을 가르치는 새로운 교육법을 발전시켰고 이런 분석적인 방법을 통해 학생들이 체험하면서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각자의 창조력에 눈뜨도록 했다.

이를 이수하고 나면 3년 과정의 ‘공작교육(Werklehre)’과 ‘형태교육(Formlehre)’으로 옮겨갔다. 이 과정은 공예와 기술에 중점을 둔 실용적인 워크숍 위주의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공작교육은 공장에서 실기를 통해 기술을 습득했으며, 형태교육은 관찰법, 표현법, 조형론 등을 훈련했다. 이후 스위스 태생의 폴 클레(1879~1940)와 슐레머(1888~1943), 라이오넬 파이닝거(1871~1956), 칸딘스키(1866~1944), 모홀리 나기(1895~1946)가 교수진으로 합세했다. 이들의 추상화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는 바우하우스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919년 그로피우스에 의해 출범한 바우하우스는 초기에 공예학교 성격을 띠었으나 1923년경에 이르면서 예술과 기술의 통합이라는 성과에 대해 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이즈음 소위 바우하우스의 새로운 교과과정도 완성됐다. 하지만 이내 환란이 다가왔다. 1925년 경제적 불황과 우파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 위기를 맞은 바우하우스는 데사우(Dessau)시의 호의로 현대적이고 기능주의적인 새로운 캠퍼스를 지어 ‘시립 바우하우스’로 자리한다.

이 시기를 데사우 시기라 하는데 이때 비로소 건축과를 신설하고, 바이마르 시절 길러낸 졸업생들이 교수로 참여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또한 새로운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인의 도입은 물론, 공업화를 추구해 실제로 산업과 미술의 이상적인 만남을 실현하게 됐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를 떠나자 스위스 건축가 한스 마이어(1889~1954)가 2대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바우하우스의 형식적인 면을 부정하고, 인민에 대한 봉사가 디자인의 본질이자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급진적인 주장은 데사우시와 불화로 이어졌고 그는 바우하우스를 떠났다. 그후 1930년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가 부임했다. 하지만 나치의 탄압으로 데사우에서 쫓겨났고 베를린으로 이주해 사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했으나 나치는 1933년 이마저도 폐쇄하고 말았다.

그 후 나치즘과 파시즘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바우하우스에 참여했던 많은 예술가들은 유럽을 탈출했다. 1937년 그로피우스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 디자인대학원에서 강의하면서 미국과 영국에 국제적인 양식이 자리할 수 있도록 했다. 같은 해 미국에 도착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시카고의 일리노이공과대학에 자리 잡고 시카고 건축을 이끌었다. 모흘리 나기도 시카고 디자인연구소를 맡아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실천에 옮겼다. 1933년 미국에 건너온 조셉 알버스는 블랙 마운틴대학의 회화과 교수로 제자들을 키워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3년 바우하우스는 울름(Ulm)에서 바우하우스의 학생이었던 막스 빌(1908~1994)이 울름 디자인 학교의 초대 교장이 돼 부활한다. 그는 산업현장과 함께 연구하고 협업하는 연구소로서의 대학의 기능을 강조했다.
<정준모 큐레이터/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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