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속 현대 군사명저를 찾아

[현대군사명저] 독일-러시아 충돌… 신화 걷어낸 전투 현장 ‘생생’

김상윤

입력 2019. 11. 03   13:21
업데이트 2019. 11. 05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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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39>


저서『탄넨베르크: 제국의 충돌, 1914』

Tannenberg: Clash of Empire 1914

저자: 데니스 쇼월터

Dennis E. Showalter.

출판Brassey’s inc., 2004. 미번역
 


제1차 대전 초기 지휘관들, 전체 국면 이해 못해 혼란  

독일, 실수 빨리 회복하고 군수 우위 보이며 ‘승기’

콜로라도대학 역사학 교수인 데니스 쇼월터 박사는 저서 『탄넨베르크: 제국의 충돌, 1914』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의 초기 전투인 탄넨베르크 전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장대한 드라마를 복원해 줬다. 그는 이 책에서 전투에 대한 신화와 전설을 걷어내고, 생생한 전투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그리고 대전략에서부터 분대 규모 전투의 발생 원인, 효과, 함의를 깊이 있게 분석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사라진 독일군 초기 승리 재현


쇼월터 교수는 독일의 관점에서 탄넨베르크 전투를 논한다. 그러나 전혀 독일의 입장으로 기울지 않았고 독일과 러시아, 양국 상황을 객관적 데이터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양측 지휘체계의 문제점, 병사들이 겪는 전장에서의 기아와 고통을 낱낱이 서술한다. 


저자는 전투의 초기 국면 즉, 굼비넨 전투는 독일과 러시아 중 누가 이길지 모르게 전개됐고, 양국 군대 모두에게 승리의 기회가 있었으며, 전술적 과오 역시 양쪽 모두 많았음을 문헌 자료를 통해 입증했다.


탄넨베르크 전투를 마치고 지휘관, 참모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힌덴부르크(맨 앞줄 오른쪽 셋째)와 루덴도르프(맨 앞줄 오른쪽 넷째), 호프만(맨 앞줄 오른쪽 둘째)의 모습.  필자 제공
탄넨베르크 전투를 마치고 지휘관, 참모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힌덴부르크(맨 앞줄 오른쪽 셋째)와 루덴도르프(맨 앞줄 오른쪽 넷째), 호프만(맨 앞줄 오른쪽 둘째)의 모습. 필자 제공


전쟁 초기에는 오히려 러시아군 쪽에 기회의 창이 열렸다가 사라졌음도 보여준다. 독일군은 굼비넨 전투에서 위기를 느끼자 서부전선 프랑스에 있던 예비근위군단, 11군단과 작센기병사단을 동부전선으로 전환했지만 이 부대는 쓸모없어지고 말았다.


전투의 신화와 진실


과거에는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부대 이동 사실을 암호화하지 않고 평문으로 전송했고, 쾨니히스베르크 요새 독일수비군이 전문을 중간에 낚아채 러시아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간파했다고 알려져 왔다.

또한 러시아 1군사령관 레넨캄프와 2군사령관 삼소노프가 러일전쟁 당시 봉천 역전(驛前)에서 다툰 원한 관계 때문에 삼소노프의 군대가 포위되는 곤경에 처했을 때 레넨캄프 장군이 구원하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또한 독일군 참모 제도와 장군참모의 우수성, 8군사령관이었던 힌덴부르크와 참모장이었던 루덴도르프, 참모 호프만의 절묘한 이심전심에 의한 ‘임무형 전술(Auftraktatik)’이 승리의 관건이었다고 인식됐다.

하지만 쇼월터 교수는 삼소노프와 렌넨캄프의 알력에 대해 증거를 들어 구체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는 호프만이 자신의 업적을 과장해 기술한 ‘탄넨베르크 전투의 진실’이라는 논문이 만들어낸 신화였고, 두 사람은 봉천 역전에서 만날 수도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갈등은 참모본부에서 군사령관과 참모장을 서로 상대 계열의 사람으로 교차 보직함으로써 근본적으로 협조가 원활하지 않도록 만든 비극의 결과라며, 이는 전적으로 제국 러시아 육군장관이었던 수호믈리노프(Sukhomlinov)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쇼월터는 일본군 3군(사령관 구로키)의 관전무관으로 참전했던 대위 시절의 호프만이 러시아군 상황을 직접 본 것처럼 묘사하는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또한 저자는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힌덴부르크 장군은 작전참모 호프만의 작전경과에 대한 브리핑이 자신의 생각과 큰 틀에서 일치했기 때문에 부대가 이동 중인 상황에서 또 다른 작전 변경이 초래할 혼란을 방지하고자 호프만의 조치를 추인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탄넨베르크 전투의 한계와 교훈

탄넨베르크 전투에서는 당시 무기체계인 기병, 자전거 부대, 제펠린(비행선) 기구를 사용한 정찰부대와 함께 초기의 항공기를 이용한 전장 관찰 및 첩보 보고, 기관총, 전화기, 무전기, 철도에 이르기까지 현대전에 진입하면서 등장한 무기들의 초창기 수단이 사용됐다.

그러나 저자는 탄넨베르크 전투는 야전군사령관이 전투를 직접 관찰하지 못한 최초의 현대전으로, 대·소 제대의 지휘관과 참모들이 방향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고, 특히 지휘관들이 전체 국면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 속에서 전투에 임했다고 분석한다.

쇼월터 교수는 결국 시스템과 군수 면에서 우수해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강조한다. 독일군이 잘못한 것을 지적하면서도, 독일군이 그러한 실수에서 러시아군보다 빨리 회복한 것이 ‘승리의 기원(Root of Victory)’이었음을 주장한다. 철도가 전장에 도입되자 장군참모장교는 이를 적극 활용한 주도면밀한 부대 이동 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피아 상황을 평가해 위험을 감수한 가운데 1개의 기병사단으로 야전군을 견제한 후 주력을 전환하게 만들었다. 이런 집중의 효과를 이보다 극명하게 드러낸 전투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전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

탄넨베르크 전투를 다룬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첫째, 현재의 한반도 안보 상황과 동아시아 각국 간 역학 관계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와 유사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10장 ‘기회와 환상’에서 승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연합군과 각국에 영향을 미친 부분을 검토하는 부분은 현 한반도 상황에 비춰 검토할 가치가 있다

둘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쟁과 전사의 종합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전투서열, 전략, 무기체계, 리더십, 전쟁원칙과 임무형 지휘를 적용하고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적합한 사례가 없을 것이다.

셋째, 사라예보에서 시작된 총성이 1차 대전으로 비화했다는 사실을 돌아볼 때, 이 전투는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미사일, 핵을 둘러싼 갈등 관리에 대한 선례가 될 수 있다. 또한 극적 전투에 이르는 경과와 전쟁 방지 노력은 유사시 전투 수행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탄넨베르크 전투는 러시아를 바라보는 독일군의 태도에 기본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독일은 1914년 이전에 러시아를 거인으로 생각했으나, 2차 대전 직전에는 경멸하는 태도로 바뀌었다. 이는 독일의 2차 대전 동부전선의 작전 및 전쟁 지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는 초기 전투에서의 승리가 전쟁의 승리를 반드시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각인시켜줬고, ‘전문직업주의’의 기준이 됐다. 평시 군이 최소한의 열정적인 준비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증명했기 때문이다. 특히 위기관리와 관련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많다.

탄넨베르크의 주역이었던 힌덴부르크는 1925년 대통령이 됐고, 1932년 재선돼 이듬해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힌덴부르크가 나치가 등장하는 데 발판을 마련해줬다는 이유로 독일은 마르부르크 성엘리자베스성당에 있는 그의 관에는 조명조차 비추지 않고 있다. 저자는 탄넨베르크에 대한 서술을 통해 현대 외교·정치·경제 문제의 맥락에서 전투를 검토하고,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직면하는 군사문제의 사례 연구로써 전투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첨예하게 보여준다.


주 은 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김상윤 기자 < ksy0609@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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