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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죽음엔…극심한 외부의 폭력이 있었다

기사입력 2019. 10. 17   16:05 최종수정 2019. 10. 17   16:24

<63> 설리는 악플 때문에 힘들었을까?


가수이자 배우였고, 진행자로서도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왔던 엔터테이너 설리(본명 최진리)가 우리 곁을 떠났다. 그는 보기 드물게 자기의 소신을 팬들과 직접 소통해 왔던, 성장하는 아이돌이었고 연예인으로서의 삶과 인간 설리, 여성 설리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고 성찰하던, 세칭 ‘개념 연예인’이었다. 단지 상품으로 소비되지 않기 위해 잘못된 유통망과도 꾸준히 싸워왔던 그는 투사이기도 했다.

사실 이렇게 나날이 성장하는 아티스트는 아이돌 출신 중에서는 물론 연예계 일반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다. 시장 자체가 안정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을 원하기 때문에, 이전에 인기를 얻었던 상품의 이미지를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새로운 도전을 원하는 연예인들은 많지만, 시장에서 반응이 없다 싶으면 바로 회귀해야만 살아남는 것이 콘텐츠 시장의 특성이다. 그렇기에 성장하는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소신이나 의지는 물론 실력과 재능이 필수요건이고, 덧붙여 그의 선택을 지원할 수 있는 팬덤이 함께 존재해야 한다. 설리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보기 드문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였다.

실제로 설리가 지난 6월 내놓은 싱글앨범은 그의 눈부신 성장을 성과로 입증한 작품이었다. 이미 f(x) 시절부터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음색으로 확고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설리는 자신이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악적 스타일을 거의 완성한 것으로 보였다.

특히 뮤직비디오를 통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은유적으로 드러낸 ‘고블린’은 아이유의 ‘스물셋’에 비교될 만큼 여성 아티스트의 성장통에 관한 음악 콘텐츠로 최고 수준의 작품을 보여줬다. 특히 설리가 직접 쓴 ‘고블린’의 가사는 스토리와 리듬, 캐릭터가 잘 살아있는, 대중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절묘하게 접목한 장인의 작품이다.

또한 판타지 동화에 어울릴 것 같은 음악 속에서, 속삭이듯이 맑고 투명한 음색으로 도로시를 반복하는 ‘도로시’는 실험적인 그의 도전을 제대로 보여주는 음악이었다. 새 울음소리, 날갯짓하는 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등이 어울리다가 마치 기차가 달려가는 듯이 표현된 드럼 비트 등을 통해 마음속 깊은 곳을 기차를 타고 둘러보는 것같이 연출한 음악은 전성기 때의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를 연상시켰다. 이 4분짜리 여행을 마치고 난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도 설리를 아티스트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설리는 이번 싱글앨범에 담긴 3곡 작사에 모두 참여했다. f(x) 시절 단 한 번도 작사나 작곡에 참여한 적 없는 설리에겐 일종의 음악적 독립선언이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아티스트로서의 자기 콘텐츠가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펼쳐 보이겠다는 각오가 없었다면 이런 도전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력이 인정되지 않았다면 냉혹한 엔터테인먼트 산업계에서 음반의 발매가 허락됐을 리 없다.

그런데도 다수 언론에서는 SM엔터테인먼트의 보도자료 문구 대신 이슈메이커 설리의 이색 도전처럼 음반 발매를 보도했다. 음반을 냈는데 그를 듣고 분석하고 그 반응을 보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고, 뮤직비디오에 피부가 얼마나 하얗게 나왔는지, 거기서도 속옷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뮤비와 같은 피부색 사진이 SNS에도 있는지 없는지 따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언론의 이런 프레임은 사실상 기사란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었다. 언론은 그의 말에 집중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가 생산한 콘텐츠에 관해서도 보도하지 않았고, 심지어 취재를 통해 기사를 쓰지도 않았다. 설리를 둘러싸고 쏟아진 보도의 다수가 SNS를 보고 상상을 통해 해석을 단 기사였고, 그 기사들에서는 당연히 설리의 입장이 함께 소개되지 않았다. 다 세칭 ‘베껴 쓰기’ 기사였기 때문이다.

검색어 순위에 설리가 올라가면 검색으로 자사의 기사가 노출되게 해서 클릭 장사를 하려고, 취재도 하지 않고 남의 기사를 베껴 제목만 다르게 달아서 장사하는 언론이 부지기수다. 이들은 100% 베껴 쓰면 표절이 되기에 일부 사진이나 일부 표현들을 더 자극적으로, 더 클릭될 수 있게 쓰기 마련이고, 이런 기사들 아래에는 당연히 악플이 달렸다. 하지만 기사들은, 그 기사를 내보낸 언론사들은, 그 기사를 노출한 포털사이트들은 그런 악플들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가수 겸 배우인 설리(본명 최진리·25)가 숨진 채 발견된 경기도 성남시 자택에서 경찰이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기사 폭력이 거듭되면 악플은 더욱 심해지고 악플러들이 양산된다. 하지만 개인으로 이 악플러들과 싸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더욱이 설리처럼 착한 연예인이라면 악플러가 동갑내기란 말을 듣고 전과자 딱지를 달게 하기 싫어서 선처해 주고, 일부 겁 많은 연예인들이라면 후에 해코지당할 일이 두려워서 선처해 준다. 그러고 나면 그들은 더 정교한 가면을 쓰고 공격을 재개한다.

그런 상황에서 설리는 비극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뮤직비디오 ‘고블린’에 암시적으로 표현된 그의 속마음은 자신이 스스로 끝을 내야 이 구조적 폭력이 멈춰질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그가 떠나자 언론과 포털사이트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가리기 위해 인터넷 실명제를 운운한다. 하지만 그것은 소비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소비자들의 입을 막으려는 물타기에 불과하다. 이 사태의 원인은 언론이 소비되는 구조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16일 경기도 성남경찰서에 따르면 설리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의로부터 “외력에 의한 사망으로 의심할 만한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 아는 사람들은 안다. 그가 얼마나 극심한 외부로부터의 폭력에 시달렸는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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