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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문화산책] 도둑맞은 빈티지

입력 2019. 10. 10   16:27
업데이트 2019. 10. 1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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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택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전문경력관·작가
박현택 국립중앙박물관 디자인전문경력관·작가


검게 물들인 군용 야전잠바나 건빵바지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계속 빨면 국방색도 검은색도 아닌 색으로 변신했다. 이걸 계속 군용이라고 해도 되나? 궁핍한 시절이었기에 낡은 군복을 물들여 입었지만, 자신을 거칠고 굳건해 보이도록 연출하고 싶었던 욕망도 있었다. 우리 시대 빈티지의 원조라 하겠다.

체형 관리에 들어간 아들이 날씬해지면서 그간 입었던 청바지들이 맵시가 나지 않게 됐다. 분리배출 통으로 가는가 했더니 그 직전 청년의 모친인 나의 아내가 바지를 들고 왔다. 멀쩡한 옷을 허리가 안 맞아서 버리려 하니, 허리 두둑한 내게 입어보라는 거다. 걸쳐 보니 대충 맞는다. 오케이! 그렇게 해서 아들이 입던 바지를 재활용하게 된 거다. 그렇게 내가 또 몇 년을 입다 보니 허옇게 색이 바랬다. 이걸 계속 청바지라고 해도 되나? 게다가 가랑이와 엉덩이 부분이 많이 닳아 해졌고, 바지 아랫단도 너덜너덜해졌다. 수선하기로 했다.

새로운 옷을 살 때는 스타일이나 색감, 재질, 가격 등을 따져보고 마음에 드는 것을 사게 된다. 비로소 상품으로 출시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숱하게 고민하고 갈등해 왔던 누군가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낡은 물건이나 옷 따위를 수선해주는 사람은 고맙지 않을까. 당연히 고맙다. 그래서 90도로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아끼는 물건의 생명을 연장해준 사람이기에.

수선했지만 또 몇 년을 입다 보니 마침내 무릎 부분까지 해져 슬쩍슬쩍 속살이 보인다. 조만간 여기도 천 조각을 덧대고 꿰매야 할 판인데, 이게 소위 ‘빈티지’란다. 빈티지란 보통 낡은 스타일, 남루하고 초라한 느낌을 의미하는데, 나는 처음에 영어단어 뜻을 모른 채 ‘빈티 난다’고 빈티지라 하는 줄 알았다. 어쨌거나 빈티지도 나름 매력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걸 수선해? 말아?

빈티지의 매력은 ‘낡은 상태’라는 물리적인 현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낡아가는 동안 집적된 기억이나 이야기, 정서의 총합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시·공간적 맥락이 수반돼야 한다. 즉 처음부터, 태생부터 빈티지라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다. 아들이 입었던 옷이지만 내 몸에 맞으니 계속 입었고, 때때로 수선집 사장님의 노고도 더해졌다. 오랜 시간을 들여 아들과 나와 사장님이 합작해 만든 빈티지가 되겠다. 물과 바람과 햇빛 또한….

수평선을 넘어가는 저녁노을이나 상큼한 긴 머리 소녀가 아름다운 것은 그 모습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빈티지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해가며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숙명을 보여주기에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한 퇴색과 쇠락의 흔적을 우리는 아련하고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더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 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에 나오는 내용이다.

백화점에서 파는 ‘찢어졌거나 구멍 났거나 색 바랜’ 빈티지 청바지. 유명 브랜드다. 그들은 빛나는 브랜드, 산뜻한 디자인만 갖고는 성이 안 차 낡음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상품을 한층 더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있다. 난 주저 없이 그들을 ‘짝퉁’이라 부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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