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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병영칼럼] 10월 10일, 쌍십절

기사입력 2019. 10. 08   16:25 최종수정 2019. 10. 09   13:19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이른바 무창봉기일은 대륙이나 대만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날이다. 이른바 쌍십절이라 부르는 이날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 기념일로 각인돼 있다. 우리에게는 독립군이었던 조선의용대가 성립된 날이며, 이봉창 의사가 순국한 날로 기억된다. 또 대만에서 1928년 5월에 당시 일본 천황의 장인을 척살(擲殺)한 24살의 조명하 의사가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 날이기도 하다.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51분 일본 천황의 장인 구니노미야 대장은 대만을 순시차 방문했고, 대한의 청년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원흉이라 여겨 그를 척살하려고 했다. 조명하는 비록 직접 척살에는 실패했지만, 공교롭게도 구니노미야 대장은 이듬해 1월에 사망했다. 조명하 의사는 체포된 그해 10월 10일에 순국했다. 그러한 조명하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한국인 학교 경내에 동상을 세워 그를 기념하고 있다.

타이베이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101빌딩·국부기념관·중정기념관·총통부 건물은 한국인 관광객에게는 아주 익숙한 관광 명소다. 그 가운데 총통부 건물은 한국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 건물이다. 굳이 이야기하면 조선총독부 건물을 한국에서 1995년까지 중앙청, 국립박물관으로 썼듯이 대만에서도 타이베이 한복판에 자리 잡은 총통부, 그곳은 일제강점기에는 대만 총독부 건물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건물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장제스는 이곳을 총통부로 사용했다. 총통부 건물 오른쪽에는 조명하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았던 고등법원 건물이 지금도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예전에 현지를 찾았을 때 경비가 아주 삼엄하진 않았지만, 힐끔힐끔 눈치를 보면서 살펴본 고등법원 건물은 지금도 대만고등법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건물 몇 층에서 조명하 의사가 사형 판결을 받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일제는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조선인 청년 조명하가 일으킨 반향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급하게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것이다.

사형선고가 내려지는 순간 조명하 의사는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을까. 타이베이 형무소에 수감된 지 며칠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조명하 의사의 마지막 길에는 아무도 동행하지 못했다. 타이베이 형무소는 총통부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지금은 형무소의 흔적만 남아있다. 대만에서도 쉽게 허물 수 없었던 모양이다. 형무소 장벽만이 그 당시 조명하 의사가 투옥됐던 현장을 세월의 무게로 전해주고 있다. 3.5m 높이의 형무소 장벽은 우체국 건물과 아파트를 지금도 보호하고 있는 듯했다. 장벽 앞에는 이곳의 연혁(沿革)을 알려주는 몇 개의 동판과 목판 설명문이 눈에 들어왔다.

2008년에는 이곳에서 희생된 미국인들의 모습을 역사의 카메라에 담기라도 하듯, 깊게 새긴 동판이 부착돼 있었다. 하지만 한국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 대만에서 일제의 심장을 노린 열혈남아 그가 순국한 곳에 후손들은 아직도 제대로 된 기념 표지 하나 남기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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