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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검열 관행 전시(戰時)언론, 베트남전에선 달랐다

입력 2019. 09. 17   16:33
업데이트 2019. 09. 1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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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베트남 전쟁과 언론(상)


 제1·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전선에서 종군기자 취재 허용하는 대신
애국주의적 관점 자국 이익 일방적 대변

  
베트남 전쟁
베트콩 기습 ‘뗏 대공세’로 전선 밀리자
미군, 대대적 포격으로 민간인 사망자 속출
언론들 우호적 보도서 ‘전쟁 참상’ 알리기 선회


“펜은 칼보다 강하다”,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는 제4부다”. 흔히 인용되는 이런 문구들은 언론이 정부와 비견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입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언론이 처한 제도적 환경이나 역사적 상황에 따라 언론의 영향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 언론은 공산당 소속 정부 기관일 뿐”


중국·베트남·북한처럼 여전히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국가에서 언론의 힘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들 국가에서 언론은 그 자체로 공산당에 소속된 정부 기관일 뿐이다. 그러면 언론의 자유가 주어지고 언론이 정부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비즈니스 영역에서 작동하는 자유주의 국가는 어떨까?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놈 촘스키는 ‘프로파간다(propaganda) 모델’을 통해 자유주의 국가의 언론도 정부 입장을 거스르지 못한다고 말했다. 촘스키의 논리에 따르면, 아무리 큰 언론사라도 모든 곳에 취재 기자를 보낼 수 없다. 그래서 언론사들은 주로 백악관이나 펜타곤처럼 뉴스거리가 많은 곳에 기자를 배치하는데, 여기서 얻는 정보는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취재 기자나 편집인이 정부가 주는 정보를 의심하고 비판적인 보도 태도를 취하면 그 이후로는 접근이 차단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따라서 자유주의 국가라고 할지라도 언론이 내보내는 뉴스는 정부를 대변하거나 적어도 정부 입장을 거스르지 않는 정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연 촘스키의 주장은 타당한가? 이 모델에 대한 가장 좋은 시금석이 전시(戰時) 언론이다. 국가가 다른 나라와 전쟁에 돌입했을 때, 언론은 과연 자국 정부 입장이나 애국주의적 관점에서 자국의 이익만 일방적으로 대변하게 될 것인가?

촘스키의 프로파간다 모델은 최소한 제1·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당시에는 유효했다. 언론사가 종군기자를 보내 전선에서 취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대신 군대의 보도검열을 받아들이는 것은 합의된 관행이었다. 6·25전쟁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보도검열 포고령을 내리면서 유엔 연합군에 대한 어떤 부정적 보도도 금지했다. 그런데 이 모델은 ‘검열받지 않은 전쟁’이라 불리는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바뀌게 된다.



베트남전쟁 초기 10년, 대부분 정부 발표에 의존


1955년 시작해 1975년 끝난 베트남 전쟁은 초기 10년 동안 별로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뉴욕타임스가 사이공에 특파원을 파견한 것을 제외하면 대다수 언론은 독자적인 취재 대신 정부의 발표에 의존했고, 전쟁 소식도 이따금 다뤘다. 6·25전쟁 직후 냉전 분위기 형성되면서, 미국 정계에서도 국가 안보에 대해서는 여당과 야당 사이에 정쟁이 존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인식됐고, 언론도 국가안보 문제는 신중하게 다뤘다. 자연스럽게 초기에는 미국 국민 여론도 전쟁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다.

베트남이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계기는 전 세계에 보도돼 유명해진 1963년 불교 승려 틱꽝득의 분신자살이다(사진1). 남베트남에서 응오딘지엠 총통의 가톨릭 우대 정책은 불교 신자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 그 도화선이 된 것이 이 분신자살 사건이다.

불교계의 저항으로 어수선한 정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하고 쿠데타 세력은 응오딘지엠을 처형한다. 그러면서 미국의 베트남 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시작된다. 여론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는 언론에 대한 대응책을 펴기 시작한다. 케네디 대통령이 직접 뉴욕타임스 발행인 아서 슐츠버그에게 사이공 특파원을 소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한다. 그러자 미국 정부와 펜타곤은 기자들을 모집해 베트남 현지를 둘러보고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장을 직접 목격하면 더 정확하고 애국적 기사가 나올 것이라는 계산에서였고, 이 계산은 적중했다.

언론 보도는 미국의 베트남 정책보다는 응오딘지엠의 실정(失政)에 맞춰졌고, 그가 처형됐을 때 미국 언론은 “이제야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후 미국 언론사들은 100명이 넘는 특파원들을 베트남 현지에 파견했고, 특파원들은 종군기자로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한다.


베트콩 포로 권총으로 머리 날리는 사진 ‘일파만파’


1968년 뗏 대공세(Tet offensive)를 계기로 베트남 전쟁은 반전을 겪게 된다. 1월 30일 설날을 맞이해 이틀 동안 휴전하기로 약속했으나, 베트콩과 북베트남 인민군은 약속을 어기고 사이공과 후에 등지에서 미군 주요 시설과 대사관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뗏 대공세 초기, 기습에 놀란 미군은 상당수 지역에서 퇴각했고 나중에 이 지역들을 탈환하기 위해 대규모 포격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정규군뿐만 아니라 다수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러면서 언론 보도는 전쟁의 참상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사이공 대로에서 베트콩 포로의 머리를 권총으로 날려버리는 사진은 충격적이었다(사진2). CBS 방송은 “불쌍한 모습을 한 포로들이 베트콩이 아닌 불교 신자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높은 신뢰를 받던 언론인 월터 크롱카이트는 베트남전에 대한 우호적 입장에서 선회하면서 “우리가 전쟁의 늪에 빠졌다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결론”이라고 선언했다. 뗏 대공세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 보도가 이어지면서 갤럽 여론조사 결과 존슨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두 달 사이 51%에서 32%로 급감했다.

<김선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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