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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허기·피곤과의 싸움이 계속되다

기사입력 2019. 09. 10   17:10 최종수정 2019. 09. 10   17:16

<35> 제4부, 아! 청산리대첩 ⑩ 갑산촌 동포들과 급박한 첩보

후위대의 늦은 갑산촌 도착에
김좌진·이범석 감격의 눈시울
동포들 기꺼이 차조 곳간 열어
장정 600여 명 허기 채우고 휴식
일본군 천수동 숙영 첩보 확인
참모들 쉴 틈 없이 전투태세로

갑산촌의 모습. 이 경사진 밭에서 거둔 기장으로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은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백운평전투는 말 그대로 완전작전이었다. 아군 피해는 부상 3명. 적 피해는 사상자 200~300명. 이날을 위해 왕청 십리평에서 모질다 할 만큼 강훈련을 시켰다. 그 역량이 여실히 드러났다. 명령체계는 톱니바퀴처럼 완벽했고 명령 수행 능력은 그 어떤 군대보다 탁월했다. 김좌진은 부하를 믿었고 부하들은 김좌진의 명령 수행이 곧 승리를 보증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승리의 기쁨도 있었지만 다음 집결지인 갑산촌은 멀었다. 백운평에서 갑산촌까지 지도상 직선 거리는 20㎞ 정도다. 그러나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 갑산촌에 이르는 길은 정찰과 휴식을 하고 노출을 피하기 위해 개활지를 우회하다 보니 60㎞에 달했다. 거기에다 그악스러운 일본군이 도처에 전개 중이었다. 마천령을 넘어 봉밀하를 끼고 도는 이동로는 쉽사리 갑산촌에 도착하도록 내버려 두질 않았다. 무엇보다 추위·굶주림과 싸우는 게 힘들었다. 백운평전투도 사실 허기를 참으며 이룬 승리다. 김훈은 그때를 이렇게 적었다.

“아군은 싸리밭촌에서 한때의 식량을 준비하여 청산리 산림 속으로 20리를 몰래 행군하여 산림 중에 하룻밤을 노숙하고 다음날(즉 20일)에 이르러서는 휴대하였던 식량이 다하였으므로 그날은 굶게 되었소. 그날 밤에 군사 50명으로 하여금 싸리밭촌으로부터 1리 반쯤 떨어진 임연소 촌락에 파견하여 양식을 운반하여다가 각 부대에 분배하니 병사마다 감자 세 알에다 좁쌀 한 사발씩이었는데 이것을 한꺼번에 먹지 말고 아껴 먹으라고 하였으나 여러 끼를 굶은 때문에 한꺼번에 다 먹고 말았소.”

키가 6척이 넘는 서른두 살의 김좌진인들 허기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동로도 만만찮았다. 이범석의 말이다.

“추위와 주림과 피곤이 온몸을 휘감았다. 한나절의 격투를 치르고도 우리는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산바람이 길을 막는 비탈길을 더듬어 자산춘으로 향했다. (중략) 만주의 깊은 가을바람은 예리한 칼로 오려 내듯이 홑옷으로 가린 우리 살을 에었다. 밀림 속에는 길이 없다. 그저 우리가 밟고 가는 곳이 길이다. 쓰러진 수목과 허물어진 바위의 돌가루가 도처에 쌓여 있고 산비탈은 갈수록 험해질 뿐이었다. 밀림을 지날 때면 우거진 나뭇가지가 길을 막아 도끼로 이를 찍어 내야만 길을 열 수 있었다. 우리들의 전신은 쉴 새 없는 산과 밀림과의 싸움이었고 한없는 굶주림, 추위, 피곤과의 싸움이었다.”

갑산촌에 먼저 도착한 김좌진은 애가 끓었다. 이범석이 인솔하는 후위대가 새벽 두 시가 되어도 도착하지 않았다. 갑산촌 동포들에게 부탁하여 지어 놓은 기장밥에 먼저 도착한 1제대원 그 어느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초조한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밤 2시30분경 경계병이 먼저 뛰어오며 소리쳤다. “후위가 도착했다!” 앉지도 못했던 김좌진이 봉밀하 방향으로 뛰어갔다. 이범석이 전위와 함께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목이 메었다. 이범석은 30분 동안이나 김좌진이 자신의 목을 껴안고 감격했다고 회상했다. “김 장군의 눈시울에 어른거리는 빛으로 무언가 이야기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했을까? 이범석·김훈 등 후위 2제대를, 믿을 수 있는 연성대 병력으로 편성했다고는 하나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기다림은 온갖 상념을 떠올리게 하고도 남았다. 2제대는 부상병 3명까지 ‘담가(擔架, 들것)’에 싣고 갑산촌에 무사히 합류했다.

‘갑산촌(甲山村)’은 함경도 갑산인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다. 오지의 대명사로 불리는 ‘삼수갑산(三水甲山)’의 ‘갑산’이 바로 갑산촌 동포들의 고향이다. 개마고원 동쪽에 자리해 백두산을 머리에 이고 사는 지역이다. 농토를 찾아 흘러들어 왔지만 그들을 기다리는 트인 평지는 없었다. 수전을 풀 곳을 찾아 유랑하느니 오히려 부족하나 고향의 농토를 닮은 경사진 밭 터가 편했다. 우선 터 잡고 앉기에도 그랬다. 그곳엔 지금도 논이 없다. 처녀가 쌀 한 됫박 못 먹고 시집가기는 고향 함경도에서나 매일반이었다. 그래도 억척스레 경사지를 개간해 감자를 심고 조와 기장 씨를 뿌렸다. 궁벽하기는 했지만 열심히 살아온 덕에 쌀밥은 아니어도 자식들 배 굶기는 일은 없었다. 소문을 듣고 꾸역꾸역 모여든 고향 사람들이 동네를 이루고 근동에서는 규모가 제일 큰 동네로 변했다. 겨울이면 사냥이 주업이었고 봄철부터 아낙들은 산채 거두길 쉬지 않았다.

김좌진은 갑산촌 동포들에게 밥을 부탁했다. 갑산촌 동포들은 기꺼이 차조 곳간을 열었다. 장정 600여 명의 허기를 채우려면 엄청난 양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한 돼지까지 몇 마리 잡았다. 몇 점 돌아가진 않았지만 구수한 저육 국물에 김이 오르는 차조밥은 흥부네 자식 입으로 밥 집어 넣듯 꿀맛이었다. 갑산촌 동포들은 한술 더 떠서 마을 집집마다 고방에 불을 지피고 대원들을 맞았다. “하루 종일 극심한 피로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갑자기 방안의 온기를 접하고, 또 거기서 뜨끈뜨끈한 차조밥을 마구 삼키고 나니 대부분의 동지들은 땅바닥이나 온돌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지고 말았다.” 이범석의 회고다.

그러나 꿀처럼 달콤한 휴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적의 동향이 첩보로 들어왔다. 그나마 병사들은 한 시간 남짓이지만 쪽잠으로 휴식을 했으나 김좌진과 참모들은 쉴 여유가 없었다. 이웃 마을에 나갔다 돌아온 주민이 천수평에 일본군이 있다는 것이었다. 김좌진은 바로 정찰병을 보냈다. 첩보는 정확했다. 적 기병이 천수동에서 숙영하고 있는 것을 방문까지 열어 보고 확인한 결과였다. 그뿐만 아니라 어랑촌에 보병 2개 대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가 숙영하고 있다는 정보까지 얻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막 단잠에 빠진 대원들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전투근무지원이 차단된 독립군의 작전은 대부분이 그랬다. 추위와 허기, 그리고 피곤과의 싸움이었다. 화룡 일대에서 치중선을 확보한다는 것은 2차 대전 당시 미군보다 더 막강한 전투근무지휘체계를 갖췄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본군과 중국군이 전개된 상태에서의 작전은 현지 조달 외에는 배를 채울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정도의 인구가 사는 것도 아니었다. 돈이 있다고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 전장이었다.  <김종해 예비역 육군대령/ 한중우의공원 관장>



국방일보 창간 55주년·임정 100주년·청산리전투 승전 99주년 특별기획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독후감을 공모합니다


국방일보-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공동 기획  

  - 대상: 국군 장병 포함 전 국민
  - 작품 규격: 2000자 이내 한글문서(HWP)
  - 접수처: 인터넷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홈페이지(이름, 소속, 계급, 명함판 사진, 연락처, 주소 기재 필수)
  - 접수 기간: 8월 16일부터 9월 17일까지
  - 시상식: 10월 18일
  - 문의: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02-780-8877, 디지털국방일보팀 02-2079-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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