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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병영칼럼] 간도참변과 관동대진재의 ‘한인 학살’

입력 2019. 09. 05   15:44
업데이트 2019. 09. 0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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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 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김 주 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는 관동대진재라는 초유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재일 한인’이 무참하게 희생당했다. 몇 해 전 영화 ‘박열’이 상영되면서 한국인들은 관동대진재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정례화되지 못한 기억의 소환은 잊히게 마련이다.

관동대진재 때 제국 일본은 피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희생물이 필요했으며, 유언비어를 통해 ‘재일 한인’들을 욕보이고 학살했다. 4년 뒤면 그 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다. 상처가 치유되기에는 충분한 시간 같지만, 이에 대한 일본의 반성은 전혀 없는 상태다.

1920년 10월부터 만주지역에도 제국 일본의 학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한국사에서는 이를 ‘경신참변’ 또는 ‘간도참변’이라고 한다.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세력들의 국내 진공작전은 더욱 치밀하게 진행됐다. 국경선 부근을 중심으로 독립군 세력의 압박이 커지자 일제는 대륙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0년 4월 28일 봉천 일본총영사 아카츠가(赤塚)는 장쭤린(張作霖)에게 서북간도 일대에 중국 군대를 증파해 ‘불령선인 단체’의 단속을 요구했다. 그해 5월부터 8월까지 서북간도의 치안유지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고 인식한 제국 일본은 만주의 실권자였던 장쭤린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았다. 하지만 중국 영토에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려면 그에 적합한 명분을 찾아야 했다. 1920년 10월 2일 마적 장강호가 대규모의 인원으로 훈춘영사관을 공격한 것이 명분이 됐는데, 이때 장강호는 몰래 일제의 예산을 지원받았으며, 이것이 역사에 남은 ‘훈춘사건’이다. 대륙을 침략하기 위해 자국민까지 희생하면서 단행한 이른바 ‘간도출병’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비극적인 학살의 그림자였다. 그때 파견된 일본군은 조선군 제19사단, 관동군을 비롯해 2만 명 정도였다.

1920년 10월 16일부터 제국 일본군은 서간도·북간도를 침략했으며, 독립신문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희생당한 한인이 1500여 명이라고 한다. 비무장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은 중국 신문에서도 대서특필했다. 자신들의 영토에서 유린당한 한인들의 상황이 언제 중국에 다가올지도 모를 위험으로 인식한 것 같다. 당시 종군기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활동했던 안중근 의사의 둘째 동생 안정근은 이러한 상황을 독립신문에 게재했다. 하지만 아직도 정확한 한인 희생자 수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금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장암동에는 그때 희생당한 40여 구의 유해를 합장한 묘역도 있다.

몇 해 전 겨울, 필자가 그곳에 갔을 때 만주벌의 칼바람이 유난히 심했던 기억이 있다. 경신참변 유적지 가운데 장암동 유적지만이 후손들의 보살핌으로 보존돼 1920년 10월 이후 일제의 반인류적·야만적 광풍 속에서 희생당한 한인들의 고난 역사를 처절하게 말해주고 있다. 조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희생된 100년 전의 그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동북아에서 ‘야만의 광풍’을 끝내고 평화공동체를 실현하려는 이 시대의 사명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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