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전쟁과 미디어

오직… 영웅만 바라보며 영웅과 하나되다

입력 2019. 09. 03   17:07
업데이트 2019. 09. 03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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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텔레비전 생중계의 위력을 일깨워준 시카고 ‘맥아더의 날’ 행사


해임된 맥아더 고향 돌아가는 길
시카고서 퍼레이드 등 대규모 행사
카메라 통한 3시간 동안 시선 고정
정서적으로 동화돼 ‘압도하는 효과’
여론 조작·통제 수단 우려 있었지만
사회통합·평화 기여 사례 더 많아  

  


1951년 4월 26일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맥아더의 날’ 행사 장면.  필자 제공
1951년 4월 26일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맥아더의 날’ 행사 장면. 필자 제공

인간이 만든 미디어 기술 중에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비디오 생중계다. 저 멀리서 벌어지는 일들을 현장에 직접 가지 않고도 안방에서 실시간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7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한 1950년대에 비디오 생중계를 시청하는 것은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미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은 텔레비전이라는 당대의 뉴미디어가 인간에게 선물해준 신선한 경험이었다.
올림픽을 비롯한 스포츠 생중계는 많은 시청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방송국에도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고 있다. 하룻밤 자고 나면 결과를 알 수 있는데도 굳이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보느라 밤을 새우는 사람도 많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동영상이 넘쳐나지만, 비디오 생중계를 시청하는 것은 여전히 독특한 경험이다. 유튜브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플랫폼은 실시간 동영상에 가중치를 부여한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은 다른 동영상 콘텐츠나 그래픽 콘텐츠에 비해 실시간 동영상이 우선적으로 노출되도록 알고리즘을 설계하며, 실시간 동영상에 대해서는 별도로 알림 서비스를 제공한다.

비디오 생중계의 위력을 일깨워준 사건 중 하나가 1951년 4월 26일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맥아더의 날’ 행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한국전 총사령관 맥아더는 중국과의 확전을 두고 3차 대전 가능성을 두려워했던 트루먼 행정부와 갈등을 겪었고, 1951년 4월 10일 총사령관 지위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복귀하게 된다.

맥아더 해임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미국 상원은 맥아더 해임의 위헌 여부를 검토한 결과, “대통령의 헌법적 권한 내에서 이뤄진 일이지만, 이 상황은 국가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고 결론 내렸다. 대중적 지지도 측면에서 맥아더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을 월등히 앞섰던 만큼, 많은 미국인도 그의 해임을 안타까워했다.

맥아더는 한국에서 복귀 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여러 개 도시를 방문했는데, 그가 방문했던 다섯 번째 도시가 시카고였다. 맥아더 방문 소식에 시카고시는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마련했다. 17발의 예포와 함께 12대의 차량을 동원해 미디웨이 공항에서 시내까지 퍼레이드를 펼치고, 맥아더 일행이 통과할 때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환영을 표했다. 시카고 시내에서는 300만 명의 시민이 도열해 성조기를 흔들었고, 텔레비전 방송국은 3시간 동안 이 장면들을 생중계했다.

‘맥아더의 날’ 행사는 학문적 연구 대상이기도 했다. 시카고대학교의 사회학자인 커트 랭과 글래디 랭은 맥아더의 날 행사를 현장에서 지켜보는 것과 텔레비전 생중계로 보는 것이 얼마나 다른 경험인지 분석했다. 직관적으로 생각해보면,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사람들이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간접 경험하는 사람들보다 행사를 더 스펙터클한 것으로 여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 결과는 달랐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멀리에서 잠깐 맥아더를 지켜봤지만, 텔레비전 시청자는 맥아더를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통해 그 일행을 3시간 내내 볼 수 있었다. 게다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 시야에 들어오는 수천 명의 군중밖에 볼 수 없었지만, 시청자는 수십만 군중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카메라는 사람이 맨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선택적으로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또한 시청자들이 현장 군중보다 맥아더 장군에 대해 더 많은 친밀감을 느낀다는 점을 발견했다. 텔레비전 시청자는 맥아더 얼굴의 클로즈업 샷을 통해 그의 표정을 읽으며 정서적으로 동화될 수 있었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군중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맥아더의 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분석하면서 연구자들은 텔레비전 생중계가 여론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있다고 봤다. 사람들이 영웅이나 주인공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면서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이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텔레비전 생중계는 압도하는 효과(landslide effect)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것이 반대 여론을 억압하거나 만장일치 여론이 존재한다는 거짓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 대해 우려했다.

‘맥아더의 날’에 대한 연구 이후 대형 이벤트에 대한 텔레비전 생중계가 여론 조작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우려와 더불어 많은 사례 연구가 이어졌다. 그런데 연구 결과 우려와 달리 텔레비전 생중계가 전체주의적 여론 통제보다는 다원주의적 사회 통합이나 국제적 평화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드러났다. 냉전 시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고국 폴란드 방문 생중계나 1977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 생중계는 이념과 종교 대립을 넘어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국제적으로 전파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의 생중계도 있었다. 그다음으로 21세기 한반도는 전 세계 사람의 주목을 받으면서 평화의 생중계가 이뤄지는 장소가 될 것이다.

<김선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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