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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적인 고유색 버리고 과감한 색·붓놀림 구사

기사입력 2019. 08. 21   17:02 최종수정 2019. 08. 21   17:05

29 야수파 -보헤미안, 내러티브, 앙데팡당, 감정주의

반자연주의 바탕 강렬한 색 선호
요철 가진 표면에 통일된 느낌

 
대표 화가 마티스·드랭·블라맹크
공동 아틀리에 사용하면서
자유롭게 생각과 기법 교환

 
3년간 세 차례 전시, 상업적 성공
내면의 감각 표현 위해 형태·색 왜곡
표현주의·추상미술 탄생에 큰 영향

마티스의 ‘모자를 쓰고 있는 여자’.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소장

앙드레 드랭의 ‘런던 샤링크로스 다리’. 
 워싱턴 국립미술관 소장


19세기 말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했다. 대체할 철학 없이 반란으로 전통을 전복시킨 대가는 컸다. 새로운 질서와 철학이 필요했다. 이때 다윈(1809~1882)의 진화론, 프로이트(1856~1939)의 정신분석학, 키르케고르(1813~1855)·하이데거(1889~1976)·니체(1844~1900)의 지적 탐구와 철학은 파리의 자유스러운 영혼인 보헤미안(Bohemian)과 예술가들에게 ‘새로움’을 재촉했다.

산업화 이후 그림은 전통적인 재현적 회화, 즉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를 만들기 위한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에서 점차 ‘따뜻함과 차가움’의 조화로 변화했다. 1839년 사진이 발명된 후 불과 50년 만에 대중화된 사진기를 코닥에서 제작·판매하면서 화가들의 임무와 역할이었던 사실적인 묘사는 무용지물이 됐다.


순간의 포착, 대상의 미시적·거시적 포착이 사진기를 통해 이뤄지면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던 것을 볼 수 있게 됐고 ‘통상적으로 보이던 것’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증기와 전기, 석유 같은 새로운 에너지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고 도시와 국가 간의 거리는 단축됐다.

그간의 진리가 유일한 ‘참’이 아니라 여러 개의 ‘참’ 중 ‘하나’라는 사실이 보편적인 가치로 자리 잡으면서 모든 것들이 관점과 생각에 따라 하나가 아니라 각각 다른 여러 개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자연스럽게 그림은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어떤 외부적인 요소나 자연, 대상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하나의 또 다른 자연,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블라맹크의 ‘샤투의 센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현대 예술에 대한 이런 변화된 생각을 반영한 것이 야수파(fauvism)다. 야수파는 그림에서 설명적이며 표현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색을 분리해 그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그림으로 만들고자 했다. 색은 자연의 세계에서 사실일 필요 없이 직접 분위기를 투사하고 예술 작품의 구조를 만들 수 있는 도구였다. 따라서 반자연주의를 바탕에 둔 야수파는 강렬한 색과 표현을 선호했다. 이들의 예술적 관심은 화면의 균형이었다. 단순화된 형태와 형태를 채운 색은 요철을 가진 표면의 질감을 형성하며 시각적으로 강하면서도 통일된 느낌을 줬다.

야수파는 개인의 표현을 중시해 개개인의 직접적인 경험과 자연에 대한 감정적 반응, 이론이나 주제보다 직관을 우선했다. 세잔, 고갱, 반 고흐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주제와 표현, 선과 색채 등의 실험을 통해 야수파의 출범을 독려했다. 화가의 심리적인 내면에 바탕을 둔 상징주의는 또 다른 영향을 미쳤다. 또 새롭게 원시미술과 토속미술, 문화인류학을 통해 새로운 소재와 아이디어가 됐다.

야수파는 느슨한 연대를 통해 1900년경 시작돼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됐지만 실제로 이들이 활동한 것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3년 동안 세 차례 전시를 연 것이 전부다. 이렇게 인상주의 이후 야수파를 거치면서 미술운동은 매우 짧은 주기로 변화한다. 세상이 산업혁명 이후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야수파를 주도했던 이들로는 상징주의 화가 모로의 제자인 마르케(1875~1947), 망갱(1874~1949), ‘야수파의 심장’ 마티스(1869~1954), 카무앙(1879~1965), 푸이(1876~1960)와 블라맹크(1876~1958), ‘야수파의 눈’ 드랭(1880~1954) 등이 있다. 또 센 강 어귀의 북쪽 영국해협과 면한 르 아브르 출신의 프리츠(1879~1949), 뒤피(1877~ 1953), 브라크(1892~1963), 조르주 루오(1871~1958), 반 동겐(1877~1968) 등도 함께했다.

스승 모로로부터 개인적 표현이야말로 위대한 화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가르침을 받은 마티스는 개성과 자유, 독창성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점묘파(Pointillism)의 기법과 색체계에 경도돼 조화로운 색의 장식적인 조합을 시도했다. 그는 튜브에서 나오는 물감의 원색을 그대로 사용했다. 1890년대에는 야외에 나가 작업을 시작해 1898년 코르시카와 남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강한 자연 채광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이후 드랭·블라맹크와 만나 파리의 교외에 공동으로 아틀리에를 얻고 대담한 색과 분방한 붓놀림을 서로 습득했다. 이들은 1905년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열린 살롱 도톤에 출품했다. 이들의 그림은 형태를 가리는 생생한 색채와 거칠 것 없는 붓 터치로 눈길을 잡았다. 당시 전시를 본 미술비평가 루이 복셀(1870~1943)이 “도나텔로가 야수들에게 둘러 싸여 있다”고 비아냥거린 것이 그대로 ‘야수파’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비평가들의 독설에도 불구하고 야수파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고 1907년 개최된 앙데팡당전에 넓고 큰 야수파의 방을 얻어낼 정도로 성공했다. 짧은 전성기였지만 이들은 함께 여행하고 아틀리에를 공유했으며 자유롭게 생각과 기법을 교환하며 성장했다.


루오의 ‘그리스도와 사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야수파는 그 어느 것보다 개인적인 표현 수단으로 색채를 중시했다. 색상과 색상의 조합은 작품의 본질적인 주제, 형식 및 리듬을 구성한다. 그들은 습관적인 고유색을 버리고 원래의 물리적 형태보다는 작가의 지각을 통해 전적으로 독립된 창조물로서 작품을 제작했다. 또 원근법이나 명암법 같은 솜씨보다 색의 배치와 조화를 더 중시했다. 주제는 주변에서 구해 풍경이나 인물을 포함했지만, 색을 가능한 모든 내러티브나 상징주의보다 우위에 뒀다. 특히 그들은 대상의 관찰자로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주체는 자신이고 자신만의 표현, 독창성, 개성을 가장 우선했다. 또 관객들에게 내적이며 창조적인 경험을 하도록 인도하는 수단으로 활발한 붓놀림과 비자연주의적인 색채를 선택했다.

이렇게 내면의 감각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와 색을 왜곡하는 야수파는 표현주의 특히 독일의 키르히너(1880~1938), 로틀루프(1884~1976) 등의 표현주의와 향후 등장할 추상미술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실’과 ‘회화적 사실’이 일치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머리보다 가슴에 의존했던 화가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야수파는 과도기였다. 1907년 세잔의 회고전 이후 많은 화가는 입체파의 길을 따르며 야수파의 뜨거운 감정주의를 버리고 차가운 입체파(Cubism)에 가세한다.

<정준모 큐레이터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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