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처럼 쓰러져간 ‘바르샤바 봉기’

입력 2019. 08. 20   15:53
업데이트 2019. 08. 2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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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폴란드(중)


바르샤바 구시가지 입구에 세워진, 바르샤바 봉기에 참가한 소년병 동상.
바르샤바 구시가지 입구에 세워진, 바르샤바 봉기에 참가한 소년병 동상.


1939년 10월, 독일·소련과의 전쟁에서 패한 폴란드군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파리에 망명정부가 들어섰다. 법적 계승자인 이 정부를 미·영·프랑스 등 서방국가는 승인했다. 영토는 없었지만 10만 명의 망국인이 폴란드군을 재건하면서 4개 보병사단과 1개 기계화여단을 만들었다. 탈출 조종사들은 프랑스 전투기로 적응훈련에 임했다.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까지 독일에 항복하자 망명정부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1945년 전쟁이 끝나고도 이들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영·미가 모스크바 동방 폴란드군을 정권 주체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배신당한 런던 망명정부는 1990년 폴란드에 민주정권이 서자 겨우 환국했다. 20세기 폴란드인들만큼 국제사회의 냉혹함을 뼈아프게 경험한 민족은 없을 것이다.


전 세계로 흩어진 폴란드군의 무용담

바르샤바 군사 및 봉기박물관(Uprising Museum)은 패전 이후 망명 폴란드군의 활약상을 보여준다. 175만 명의 폴란드군은 국외로 탈출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항복 직전 결성된 유럽 최대 지하조직은 게릴라전으로 독일군을 괴롭혔다. 또한, 외국에서 폴란드군은 새로운 부대를 속속 창설했다. 1940년 런던 상공에서는 매일 독일·연합군 간 공중전이 벌어졌다. 당시 영국인이 아닌 조종사는 605명. 그중 폴란드인이 145명으로 가장 많았고 201대의 적기를 격추, 항공전 승리에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비행기가 격추돼 폴란드 조종사들이 낙하산으로 탈출해도 영어가 서툴러 민간인들에게 독일군으로 오인돼 몰매를 맞기도 했다.

1943년 초, 이란 주둔 폴란드군 병영에서는 군인들이 어미 잃은 새끼 곰을 정성껏 돌봤다. 이 곰은 장병들을 부모처럼 따랐다. 키 180㎝, 몸무게 113㎏의 듬직한 체격을 가진 이 곰에게 ‘보이텍’이라는 이름과 병사 계급이 주어졌다. 훗날 이 병사(?)는 이탈리아 몬테카시노 전투에 탄약운반병으로 참전했다. 부대원 중 가장 많은 탄약을 전선으로 날랐고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또 부대 안에 잠입한 독일 스파이를 잡아 ‘맥주 2상자와 반나절 욕조에서의 휴식’을 포상으로 받았다. 이처럼 폴란드군은 사력을 다해 연합군을 도왔다.


바르샤바 봉기 당시 시민들이 차량에 철판을 덧씌워 만든 장갑차.
바르샤바 봉기 당시 시민들이 차량에 철판을 덧씌워 만든 장갑차.

조국 수복 위해 소련과 손잡은 망명정부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불가침조약을 깨고 일거에 소련 영토 깊숙이 진격했다. 궁지에 몰린 스탈린이 폴란드 망명정부에 손을 내밀었다. 조국을 짓밟은 적국이었지만 폴란드는 영국의 압력과 국토 수복 명분으로 소련과 군사동맹을 맺었다. 소련군 포로였던 20여만 명의 폴란드인이 부대 창설을 위해 모여들었다. 부대장 안데로스 장군의 회고록 중 일부다.

“나는 맨발의 장병들이 분열하는 군대는 처음 봤다. 부대원들은 군화도 셔츠도 없는 누더기 군복을 걸쳤다. 모두가 야위어 해골 같았고 피부에는 종기가 났다. 하지만 전원 수염을 깨끗이 깎고 훌륭한 군인의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소련인에게 군인다운 위엄을 보여주려고 했다. 미사가 시작되자 노병들은 마치 아이들처럼 울었다.”

1942년 6월 초, 소련에 있던 폴란드군 3만5000명과 민간인 수만 명이 중립국 이란으로 이동했다. 이제 폴란드군은 전 세계에서 독일군과 싸우게 됐다. 하지만 연합군을 위해 이같이 피 흘리는 동안 미·영·소련은 폴란드를 팔아먹는 협상을 시작했다. 즉 ‘폴란드·소련 국경선을 전쟁 직전보다 서쪽으로 250㎞ 옮기는 것’을 결정한 것이다.


바르샤바 봉기 당시 시민들에게 보급품을 투하해 준 영국 폭격기. 바르샤바 봉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바르샤바 봉기 당시 시민들에게 보급품을 투하해 준 영국 폭격기. 바르샤바 봉기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폴란드 역사 최대 비극 ‘바르샤바 봉기’

바르샤바 봉기박물관은 1944년 여름 22만 명의 폴란드인이 두 달간 무참하게 학살당한 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1944년 7월 25일, 소련군은 패주하는 독일군을 쫓아 바르샤바 근교 100㎞까지 진격했다. 런던 망명정부와 폴란드 국내군은 소련군 지원을 기대하며 자체 봉기를 일으켰다. 4만 명의 봉기군이 순식간에 바르샤바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최정예 독일군 친위사단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무차별 폭격과 강력한 기갑부대에 그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바르샤바강 건너편의 소련군 전투부대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봉기가 공산주의 확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코앞에서 시민들이 도륙당하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1944년 10월 2일, 결국 63일 만에 봉기군은 무릎을 꿇었다. 수천 명의 봉기군이 시민들 속으로 숨지 않고 의연하게 행진하며 스스로 포로수용소로 향했다.

바르샤바 구시가지 초입에 어른 철모를 쓰고 자기 키만 한 소총을 들고 있는 소년병 동상이 있다. 당시 12살 소년과 8살 소녀가 간호병으로 참전했다는 기막힌 사연을 이 기념비는 후세에 전한다. 전쟁 역사는 이렇게 냉혹하고 철저하게 이기적이다.


매일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드는 바르샤바 봉기박물관 전경.
매일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드는 바르샤바 봉기박물관 전경.

연합국이 내팽개친 런던 망명정부

1944년 가을, 처칠은 이미 ‘카틴 숲 학살’ ‘바르샤바 봉기’ 등 소련의 추악한 악행을 알았다. 하지만 스탈린에게 어떤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폴란드 대표에게 동부 영토를 소련에 넘기라고 강요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유럽전쟁의 빠른 종식뿐이었다.

1945년 1월 17일, 소련의 지원을 받는 동방 폴란드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도시 인구는 전쟁 전 80만에서 16만 명으로 줄었다. 폴란드 국내군은 강제 해산당하고 심지어 날조된 반란 누명으로 처형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1945년 5월, 전쟁이 끝나자 영국의 서방 폴란드군 23만 중 약 5만5000명이 귀국했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감시와 처벌, 푸대접뿐이었다. 폴란드군 마스코트 보이텍도 전역해 영국 에든버러 동물원으로 들어갔다. 폴란드 공산화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서방 폴란드군과 철창에 갇힌 이 곰의 처지는 비슷했다. 진정한 폴란드 해방을 보지 못하던 보이텍은 1963년 22살의 나이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진=필자 제공

<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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