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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도 훈련장도 사라지고… 신흥무관학교 터엔 옥수수대만…

서현우 기사입력 2019. 08. 13   17:29 최종수정 2019. 08. 13   18:13

중국 길림성 통화시

[광복74주년-간도·만주지역 독립운동 전·사적지를 찾다]


두 물줄기 하나로 합쳐지는 삼원보
뒤로는 능선이 자리 잡은 배산임수
지원자 늘자 고산자 지역으로 이전
조국과 가까워 독립 꿈 키우기 안성맞춤  

  

통화시 유하현과 통화현 일대 신흥무관학교 터들은 대부분 옥수수밭으로 변해 버렸다.

  
중국 길림성 통화(通化)시 유하현과 통화현 일대 신흥무관학교 터로 추정되는 땅은 옥수수밭으로 펼쳐져 있었다. 사람 키보다 더 큰 옥수수대가 빼곡하게 자라 이곳이 우리 독립군 산실이었다는 흔적은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 통화시에서 글·사진=서현우 기자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 전·사적지 탐방은 용정시를 거쳐 통화시로 이어졌다. 국군의 뿌리인 독립군의 발자취를 좇는 취재 흐름도 간도·만주 지역 한인촌 형성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며 독립전쟁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던 신흥무관학교로 연결됐다.

신흥무관학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통화 지역이다. 하지만 지난달 말 방문한 통화시 유하현 삼원보 지역의 신흥무관학교 터는 옥수수밭으로 변해버렸다. 학교의 농장도, 군사교육이 이뤄진 공간도, 거주하던 건물도 모두 사라졌다. 그 자리는 옥수수대들이 빼곡하게 차지해버렸다. 역사가 오롯이 버티어냈다면 우리의 독립운동 기개를 눈으로 확인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이제는 남겨진 터를 확인하거나 흐릿한 당시 사진으로 현장을 확인할 뿐이다.

삼원보 지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곳이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라는 사실이다. 이 지역은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 하나로 합쳐지는 지점이다. 삼원보라는 이름도 두 물줄기와 하나의 합쳐진 물줄기까지 세 물줄기가 흐르는 모습에서 나왔다.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터의 현재 모습. 고산자 지역에서는 정식 군사교육을 받은 대한제국무관학교 출신 교관들이 임명되면서 더욱 체계적인 교육이 실시됐다.


뒤로는 능선이 자리하고 있다. 높지 않은 능선은 터를 감싸고 있었다. 이곳에서 군사교육과 농작이 함께 이뤄졌다. 누가 봐도 좋은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도 역시 높다. 현장에서 고도계로 확인한 높이는 해발 485m였다. 서울 남산이 262m이고, 북악산은 342m다.

인근 유하현 고산자 지역 신흥무관학교 터로 자리를 옮겼다. 1919년 3·1운동으로 독립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면서 학교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넓은 부지로 이전한 곳이다. 지형이 삼원보 지역과 비슷하다. 앞으로는 하천이 뒤로는 능선이 있다.

고산자는 오래전부터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또 조선 시대에는 여진족의 주요 활동지였다. 통화시를 기준으로 놓고 봤을 때 두만강 건너 한반도는 조선 시대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해 4군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고 지배와 통제가 심화되면서 많은 조선인이 두만강 건너 이곳으로 이주했다.

자연환경, 한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위치, 인근에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한다는 사실도 이곳을 신흥무관학교 터로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간도·만주 일대가 그렇듯 이곳 역시 쉬운 지역은 아니었다. 중국에 속하는 지역으로 중국 군벌의 통제가 있었고, 일제의 영향력도 크게 미치는 곳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독립군은 하나둘 양성됐다.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이 밑거름이었다.

터만 남은 신흥무관학교 사적지 앞에서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말없이 옥수수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탐방에 동행 한 군사사 연구자가 말하지 않았다면 신흥무관학교 터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시간은 흘렀고 현장은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잃어버려서도 또 잊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는 그렇게 탄생했고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했다. 배출된 졸업생들은 다수 북로군정서와 서로군정서에 가담했고, 다시 이들이 훈련시킨 독립군들과 함께 간도·만주 지역에서 전투를 펼쳐냈다. 우리의 독립전쟁은 신흥무관학교로 말미암아 더욱 단단해졌다.

유하현 삼원보는 우리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 신흥무관학교도 시작됐다.

●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 이회영 가문 주도 설립
9년간 3500명 독립군 배출
봉오동·청산리전투 등 맹활약

신흥무관학교의 시작은 신민회였다. 신흥이라는 이름도 신민회의 ‘신’과 국가를 부흥시킨다는 의미의 ‘흥’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당시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민족지도자들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울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국외 집단 이주를 계획했고 실행에 옮겼다.

신민회 역시 1910년 12월 국외 이주를 바탕으로 독립군 기지와 무관학교를 만들고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 선택지가 통화시 유하현 지역. 제일 먼저 이주한 사람은 이회영 가문이었다. 이회영 여섯 형제 일가는 전 재산을 처분해 지금 가치로 600억 원으로 추산되는 돈을 들고 이곳으로 이주했다. 이듬해 2월에는 이상룡·김동삼·김대락 가문 등이 합류했다.

이들이 정착해 제일 먼저 한 일은 경학사 조직이었다. 집단 이주를 통한 마을 형성에 이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농장 운영이 필요했다. 공동의 농토 경작은 주민의 단합을 이루는 수단이기도 했다. 여기에 본래의 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교육기관도 필요했다. 경학사는 농작과 교육을 위한 공동의 시설이었다.

이곳 통화시 유하현을 함께 찾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김경록 선임연구원은 경학사에 대해 “협동조합과 유사한 개념으로 공동의 농작은 물론 주민들을 교육하는 역할도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주민들의 생활을 뒷받침하고 나아가 독립군을 양성하는 시설로 마을의 단합과 결사를 위한 조직이었다.

1911년 6월 본래의 목적이었던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이곳 삼원보에까지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일제의 의심을 피하고자 ‘강습소’라고 이름 붙였다. 하지만 신흥강습소는 군사 과목을 중심으로 운영하며 군사교육기관으로서 목표를 명확히 했다. 독립군을 배출하는 발판이었다.

그 후에는 1912년 통화현 합니하 지역으로 부지를 이전했다. 더 은밀하게 독립군을 양성할 공간이 필요했다. 명칭도 신흥무관학교로 변경했다. 이곳에서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은 농작과 군사교육을 병행하며 정예 독립군으로 변해갔다. 1919년 3·1운동의 영향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크게 늘자 학교를 다시 인근 유하현 고산자 지역으로 확대·이전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잠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강제 폐교하게 된다. 일제의 치밀한 통제가 원인이었다. 재정적인 부분도 문제였다. 신흥무관학교가 폐교한 1920년은 만주와 간도 지역에서 독립전쟁이 활발히 일어나던 시기였다. 봉오동전투가 1920년 6월에 일어났고, 신흥무관학교 폐교는 7월의 일이었다. 일제는 간도 일대 독립군의 주축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간파했고, 학교 폐교에 사활을 걸었다.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될 때까지 약 3500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이들은 이후 청산리전투를 포함한 독립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다.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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