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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74주년 특집] 어색한 우리말 연기 뒤엔 고려인 애환 있었다

입력 2019. 08. 07   16:43
업데이트 2019. 08. 0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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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자흐스탄 고려극장·고려신문


고려일보
1923년 연해주 ‘선봉’으로 창간
한글 모르는 독자가 많아 어려움

 
고려극장
1932년 원동변강 조선극장 창립
중앙亞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

 
‘고려인 자긍심’ 홍범도 장군
고려극장 수위로 일하다 생 마감
김대식 대사 “유해 국내봉환 노력”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 전경.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있는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 전경.

 
소련 극동 지역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맨몸으로 한겨울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던 17만여 명의 고려인들. 6500㎞ 밖 중앙아시아 황무지에 내동댕이쳐진 후 추위와 굶주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그들의 애환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달래준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과 고려신문에 대해 알아본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대표단은 지난 6월 고려인들의 80여 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 코리안하우스의 고려극장과 고려일보사를 방문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은 알마티 북쪽의 고즈넉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극장장 ‘이 류보비’와 연출자 ‘리 올레그’, 고려일보의 임원들이 다과를 준비해놓고 우리 대표단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고려극장 배우들은 연극 ‘날으는 홍범도’를 100주년 추진위원회 대표단에게 시연하기 위해 분주했다. 그동안 대표단은 고려신문 관계자들과 환담을 나누며 고려극장과 고려신문사의 역사를 들었다.



한글지면 발행…고려인 후대 한글교육 절실

고려신문은 1923년 3·1운동 4주년을 기념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전진기지’였던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인신문 ‘선봉’으로 창간됐다. 강제이주 이듬해인 1938년 5월 15일 ‘레닌기치’로 제호를 변경했고 소련 해체 후인 1991년 초에 ‘고려일보’로 명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고려일보사는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산하 조직으로 ‘김 콘스탄틴’ 편집장과 ‘남경자’ 주필, ‘정 디아나’ 기자가 이끌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발간하며 전체 16면 중 4쪽이 한글 지면인데 한글을 모르는 독자가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고려인 후대들의 한글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이곳에서도 절실하게 느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 고려인협회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일보.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 이병조 교수 제공
카자흐스탄 알마티 시내 고려인협회 건물 2층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일보. 카자흐스탄 국립대학교 이병조 교수 제공


고려인 집단농장 찾아다니며 실향 설움 달래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 구락부 소인예술단이 모태인 고려극장은 1932년 9월 9일 ‘원동변강 조선극장’으로 창립됐다. 1937년 한인 강제이주 당시 무대장치나 대형악기들은 그대로 두고 공연에 사용하는 최소한의 악기와 소품만 챙겨서 갔다. 불비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유랑극단의 진가는 강제이주 후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의 빈 창고에서 ‘극장없는 극장’으로 순회공연팀을 조직해 고려인들의 집단농장 콜호즈를 찾아다니며 춤으로, 노래로, 연극으로 실향의 설움을 달래주었다. 당시 연출자 태장춘은 1939년 고려극장 수위 홍범도 장군으로부터 지난 사연들을 듣고 연극으로 완성, 1942년 ‘의병들’이란 이름으로 초연했으며, 홍범도가 사망한 후 제목을 ‘홍범도’로 바꿨다.



한국어 공연 이뤄지는 종합예술극장으로

크즐오르다의 고려극장은 1942년 1월 13일 우슈토베로 이전했고, 1950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고려극장과 통합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고려극장은 매년 6~8개월 동안 고려인들이 경작하는 집단농장 콜호즈를 찾아 순회공연을 펼치며 그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1968년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티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극장은 창립 60주년에 ‘견우와 직녀’를 상연해 국가훈장을 받았으며, 창립 70주년에는 당시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방문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중앙아시아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고려극장은 뮤지컬·연극 등의 한국어 공연이 이뤄지는 종합예술극장으로 현재 흥부전, 놀부전, 춘향전, 심청전, 카자흐스탄 소설, 각국의 클래식 작품을 공연하며 명성을 얻고 있다.



연극 ‘날으는 홍범도’ 관람하며 눈시울

환담을 마친 대표단은 고려극장에서 고려인들과 함께 연극 ‘날으는 홍범도’를 관람했다. 연극은 무대 뒤편에서 조명효과를 살려 봉오동 전투 장면, 홍범도 부인 처형 장면이 그림자로 연출됐다. 이윽고 일본군 장교로 분한 배우가 등장, 무슨 일이 있어도 홍범도를 잡아야 한다며 이를 갈았다. 밀정인 홍범도의 부하는 홍범도를 유인하기 위해 부인의 필체로 가짜 편지를 쓰게 한다. 그러나 홍범도는 그 편지를 보고 자기 아내는 절대로 그런 편지를 쓸 사람이 아니라며 일축해버린다. 부인은 혹독한 고문에도 당당하게 버티다 결국 죽고 아들도 전투 중 전사한다. 홍범도는 계속 전투를 지휘하는데 결국 가장 믿었던 부하가 밀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홍범도가 그 부하 밀정에게 조국을 찾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일갈하면서 극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이 장면에서 관람객들은 눈시울을 적셨다. 고려인 후예들이 모국어를 잃어버렸는데 어색하나마 우리말로 연기를 하는 고려극장의 배우들이 너무나 반갑고 감사했다.

고려극장 배우들이 연극 ‘날으는 홍범도’ 공연을 마친 후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대표들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고려극장 배우들이 연극 ‘날으는 홍범도’ 공연을 마친 후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대표들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카자흐스탄서 쓸쓸히 세상 떠난 홍범도 장군

연극을 관람한 후 홍범도 장군의 일생이 궁금해졌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일했으며, 금강산 신계사 절머슴으로 지내다 비구니와 사랑에 빠졌다. 1895년 산포수와 농민들로 ‘을미의병’을 조직해 의병전쟁에 출전했고, 1907년 일제가 총포화약류 단속으로 산포수들을 억압하자 두만강을 건넜다. 홍범도는 연해주에서 농사를 지어 독립자금을 모으고 독립투쟁을 하다 아내와 아들을 모두 잃는 불운을 겪었다. 1920년 6월 4일 새벽에 발생한 봉오동전투는 일본군 사망자 157명을 포함해 사상자 500여 명을 남긴 독립군의 가장 큰 전투로 이순신·권율 장군의 대첩 이후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사상 첫 대승이었다.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도 홍범도 부대는 완루구, 어랑촌, 대굼창, 천보산, 맹개골 고동하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를 이끌어 냈다. 당시 일본군은 게릴라전에 능했던 홍범도 장군을 ‘하늘을 나는 홍범도’라고 부를 정도로 두려워했다.

‘머슴 출신 산포수’ 홍범도 장군은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수위로 근무하다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크즐오르다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김대식 주카자흐스탄 대사는 “불멸의 영웅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의 자긍심의 중심에 있다”면서 “앞으로 카자흐스탄의 고려인은 물론 대한민국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홍범도 장군을 추모할 수 있도록 하루빨리 유해를 조국(한국)으로 모시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역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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