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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사 8월 6일] 1945년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신인호

입력 2019. 08. 05   08:20
업데이트 2019. 08. 09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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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8월 6일 티니안 섬의 미 공군기지에서 3대의 공군기가 이륙했다. 폭격 임무를 띤 폭격기 외에 한 대는 촬영, 다른 한 대는 과학적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일본이 미군의 공습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3대의 미군 공군기가 그들의 본토에 접근하는 것을 추적하고 공습 경보까지 발효했다. 하지만 이내 취소해버렸다. 소규모 편대가 그들에게 위협을 줄 것으로 판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격을 위한 전투기도 출격시키지 않았다.

이날 이륙한, 폴 티베츠(Paul Warfield Tibbets, Jr. 1915. 2. 23~ 2007. 11. 1) 중령이 조종하는 에놀라 게이(Enola Gay)라는 애칭을 가진 B-29 수퍼포트리스(Superfortress) 폭격기에는 ‘리틀보이(Little Boy)’라는 이름의 원자폭탄이 실려 있었다.


폭탄의 핵탄두는 비행 중 장착되었으며 목표지점에 이르기 30분 전에 안전장치를 제거했다. 폭격기는 일본 히로시마에 이르자 고도 9,750m 상공에서 폭탄을 투했다. 투하 후 폭탄이 자동 폭발 고도 580m에 도달해 폭발하기 까지 꼭 57초가 걸렸다. 현지시간으로 오전 8시 15분이었다.


히로시마가 목표물이 된 것은 이전까지 공습을 받은 적이 없는 도시였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폭발 지점을 중심으로 반경 1.6km 이내 모든 것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총면적 11㎢가 피해를 입거나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히로시마에 약 25만 5000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중 7만 명이 초기 폭발로 인해 사망했다.

연합국 지도부는 나치 독일이 항복한 뒤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모여 회담을 갖고 포츠담 선언(1945년 7월 26일)을 발표했다. 여기서 “일본도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일본은 “결사 항전”을 외칠 뿐, 항복의 의사를 나타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 본토 진입 작전을 실행에 옮길 때 예상되는 엄청난 인명을 구제하고 전쟁을 조기에 끝낸다는 명분, 그리고 전후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는 의도 아래 원자폭탄을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 소련은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기 위한 연합국들의 행동에 눈치를 보고 있었다. 1941년 일본과 체결한 중립(불가침) 조약이 유효한 상태라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참전 후 실리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훗카이도(北海道) 분할 통치를 대일 참전의 요구 조건으로 내세우는 등 전후 동북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최대한 몸값을 높이는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이제 소련의 참전 없이도 일본이 항복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이 시점,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9일, 이전부터 한반도를 소련의 안보상 긴요한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그들은 두만강은 건너 한반도로 진주해 들어왔다. 8월9일 나가사키(長崎)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은 항복을 결심했으며 8월 15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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