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판문점은 정전협정 당시 위치가 아니다?
지명 한자 표기해 판문점 …첫 지점보다 동쪽으로 약 800m 옮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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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말, 냉전과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에서 처음으로 미국과 북한의 정상이 마주했다. 덕분에 판문점은 다시 한 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의 판문점은 66년 전인 1953년 7월 27일 실제로 정전협정이 서명·조인된 장소는 아니다. 지금의 위치에 판문점이 자리 잡기까지의 사연은 이렇다.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최초 정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개성 근교 ‘내봉장(來鳳莊)’에서 열렸다.
회담은 공산군 측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6주 후 결렬됐다. 회담을 재개하고자 한 유엔군사령부는 이곳이 중공군 점령 지역에 있어서 회담 장소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장소를 제안했다.
개성에서 좀 떨어진 현재 비무장지대 내 ‘송현리’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공산군 측은 이 제의를 거부하는 대신 ‘널문리’로 알려진 새로운 장소를 제시했다.
전쟁 이전 의주로 향하는 길목의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여기에 길손에게 술과 음식을 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널찍한 판자를 뜻하는 ‘판(板)’과 문을 의미하는 ‘문(門)’ 그리고 마을(里) 대신 가게의 뜻을 가진 ‘점(店)’을 결합해 ‘판문점’이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유엔군 측이 공산군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옛 문산리(현재 북한 판문리에 있는 평화박물관)가 회담 장소로 낙점됐고, 이곳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현재의 판문점은 실제 정전협정이 서명·조인된 장소가 아닌 것이다.
정전협정이 조인된 뒤 유엔군 측은 이 판문점이 군사분계선 상이 아닌 그 북쪽, 즉 북한 측 비무장지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따라 1953년 10월 20일 군사정전위원회 회의 장소를 최초 판문점 지점에서 동쪽으로 약 800m 떨어진 군사분계선 상의 현재 위치로 옮겼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발효되고 양측 포로들은 8, 9월에 판문점을 통해 남과 북으로 귀환했다.
처음에는 천막으로 시작했으나, 휴전이 장기화함에 따라 군사정전위 본회의장과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이 항구적인 건물로 바뀌게 됐다. 우리의 ‘자유의 집’(1965)과 북한의 ‘판문각’(1968) 등 콘크리트 건물도 세워졌다.
1980년대 이르러 남북의 대화가 잦아지자 우리 ‘평화의 집’과 북한 ‘통일각’ 등 남북대화용 건물도 자리를 잡게 됐다.
조아미 기자 joajoa@dema.mil.kr
클라크 사령관의 바로 이 책상 전쟁기념관에 있다
나머지 한 개는 평택에… 수석대표 쓴 테이블은 北서 관리
● 정전협정 당시 테이블은 어디에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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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 정전회담 대표단을 태운 H-5 헬기가 1번 국도 언저리에 자리 잡은 주막거리의 묵직한 적막함을 깨운다.
협상장 주변으로 반듯하게 차려입은 각국 병사들이 상기된 모습으로 경계를 서고 있다. 빈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해군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 남일은 책상 위 문서에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 내려간다. 이후 양측 수석대표는 각각 마크 W. 클라크(미 육군대장) 유엔군사령관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화이의 서명을 받게 된다.
해리슨 중장은 이 협정문을 당시 문산 지역에 있던 유엔군 캠프로 가져왔다. 정전협정 조인식이 끝난 후 3시간이 지난 오후 1시, 클라크 사령관은 유엔군 측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 과정에서 사용된 테이블은 여러 개다. 우리가 흔히 접한 정전협정 당시 사진 속 테이블은 해리슨 제독과 남일이 사용한 책상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박동찬 연구원은 이와 관련해 “이 책상은 현재 북한 판문리에 있는 평화박물관에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면서 “따라서 현재 북한 측이 관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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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에서 서명이 이뤄진 뒤 클라크 사령관이 정전협정에 서명할 당시 배치됐던 책상은 2개다. 그중 1개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문화재 가치를 인정받아 근대문화재 464호로 등록됐다. 전쟁기념관 측은 “문산에서 클라크 사령관이 정전협정을 조인할 당시 사용한 책상은 2개였다”면서 “그중 1개를 1993년 전쟁기념사업회가 미 육군 군사감실로부터 기증받아 1994년 6월 전쟁기념관 개관 이후 현재까지 전시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1개는 어디에 있을까? ‘서울 용산 한미연합사에 있다’, ‘평택 미군기지에 있다’는 두 가지 의견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와 관련해 한미연합사 관계자는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평택 유엔군사령부와 주한미군사령부가 있는 건물 안에 클라크 사령관이 정전협정 당시 서명할 때 사용한 테이블이 있다”고 밝혔다. 책상은 가로 1m×세로 1.5m 정도 크기로, 바닥에는 정전협정 서명일(1953년 7월 27일 오전 11시)을 기념하는 글귀를 새긴 동판이 붙어 있다. 조아미 기자
/참고 문헌=박동찬 편저 『한 권으로 읽는 6·25전쟁』
갈등의 상징에서 변화의 공간으로
도끼 만행 사건부터 南·北·美 정상 회동까지
● 판문점의 과거와 현재
자유롭게 왕래하던 남북 경비병
1976년 이후 경비 구조 큰 변화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으로
한반도에 전 세계 이목 집중돼
지난달엔 남·북·미 정상 한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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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판문점에서는 6·25전쟁의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하지만 정전 상황에서도 판문점은 갈등과 충돌의 공간이었다. 수십 년 동안 끊임없는 사건을 겪어 왔다. 시간이 흘러 정전협정 66년이 지난 지금,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자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던 판문점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반복된 충돌과 긴장 고조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자유의 다리 인근에서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를 비롯한 미군 장병 6명과 국군 5명 등 11명이 15m 높이의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때 북한군 십여 명이 나타나 작업 중지를 요구했고, 보니파스 대위는 전지 작업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해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자 북한군이 곡괭이와 도끼 등으로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 등 미군 2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사건 직후 리처드 스틸웰 주한미군사령관은 포드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폴 버니언 작전’을 수행했다. 미국은 폭격기·전투기 수십 대와 항공모함·호위함 수십 척을 한반도에 배치했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또는 ‘8·18 도끼 만행’ 등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전면전으로까지 이어질 뻔한 갈등이자 판문점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는 결국 절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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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판문점 내 JSA에는 남북 간 경계 표시가 설정됐고, 상대 지역에 설치된 초소는 모두 철거됐다. 또 정전협정 당시 포로를 교환했던 ‘돌아오지 않는 다리’도 함께 폐쇄됐다. 더불어 이전까지 JSA 내에서 자유롭게 상대측 진영을 왕래하던 남북 경비병들은 사건 이후 이동이 제한됐다. 군사분계선에 걸쳐 있는 7개 건물도 유엔사와 북한군이 구분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가운데 파란색 건물 3개, 즉 T1(중립국감독위원회 회담장), T2(군사정전위원회 회담장), T3(실무장교 회의실)은 유엔사가, 그 외 나머지 건물은 북한군이 관리를 맡게 됐다.
물론 이 사건 전에도 판문점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있었다. 1962년 9월 남북한 병사들 간 언쟁이 총격전으로 이어져 북한군 3명이 사망했고 1975년 6월에는 유엔군 소속 W.D 헨더슨 소령이 북한군 경비병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 1984년 11월에는 소련 관광 가이드 바실리 마투조크가 판문점 남측으로 넘어와 남북 간 총격전이 벌어졌고 국군 1명과 북한군 수명이 사망했다. 최근에는 2017년 11월 북한군 하전사(병사) 오청성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하는 과정에서 총상을 당해 우리 군 장병이 구출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판문점에 찾아온 변화
그러던 것이 지난해 4월 ‘판문점 선언’과 9월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9·19군사합의)’를 거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손을 맞잡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판문점에서 남북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고 전쟁 위협을 실질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합의하는 ‘판문점 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진행된 3차 남북정상회담에서는 9·19군사합의가 도출돼 남북은 판문점 JSA 내 남북 초소 9곳을 폐쇄하고, 화기와 탄약을 철수했다. 남북 경비대원들도 비무장 합의에 따라 권총을 내려놓고 근무를 하게 됐다. 과거 총격전이 벌어졌던 갈등과 충돌의 판문점에서 무기가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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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시작된 비무장지대 내 감시초소(GP) 철수도 같은 맥락이다. 남북은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상호 1㎞ 이내에 있는 감시초소 22개(각 11개) 중 20개(각 10개)를 완전히 파괴했다. 각 1개씩은 병력과 장비는 철수하되 역사적 의미를 고려해 보존하기로 했다. 그동안 ‘무장’ 상태였던 비무장지대가 진정한 ‘비무장’ 지대로 올바르게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또 지난 6월 30일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문 대통령이 일 년 전 그랬던 것처럼 김 위원장을 만났다.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잠시나마 북측 지역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판문점에 모인 남·북·미 정상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당시 문 대통령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큰 이정표를 세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역사의 현장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공간으로 계속 변화하고 있다. 서현우 기자 lgiant61@dema.mil.kr
판문점 주요 사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1953년 7월 군사정전위원회 중립국감시단 설치
1971년 8월 남북 적십자 첫 접촉
1975년 6월 W.D. 헨더슨 소령 집단폭행 사건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1994년 3월 남북 특사교환 판문점 실무회담에서 북측 서울 불바다 발언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판문점 통해 방북
1998년 6월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 판문점 통해 방북
2004년 유엔사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으로 이전
2017년 11월 북한군 귀순 총격사건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 9·19군사합의
2018년 11월 판문점 JSA 비무장화 완료
2019년 6월 판문점 남·북·미 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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