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소년병의 운명에서 ‘조국 광복’의 무게를 느끼다

입력 2019. 07. 16   16:22
업데이트 2019. 07. 1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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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제4부, 아! 청산리대첩 ② 대감자(大坎子)의 소년병들


무관학교 입학 지원자 대감자서 대기
귀향 거부하자 김좌진 즉석에서 시험
사관연성소 2기생 될 것으로 기대 

 
북로군정서, 1개 지대 주둔지
흑웅동서 ‘대감자 간부회의’ 개최 

 

서일과 김좌진이 차후 노선을 최종 정리했던 ‘흑웅동회의’ 장소, 흑웅동의 현재 모습.
서일과 김좌진이 차후 노선을 최종 정리했던 ‘흑웅동회의’ 장소, 흑웅동의 현재 모습.
대감자촌. 이곳에서 50명의 연성소 입영 대기 장정들을 데리고 떠났다.
대감자촌. 이곳에서 50명의 연성소 입영 대기 장정들을 데리고 떠났다.

김좌진에게는 10년 이상 연상의 비서가 한 사람 있었다. 전속부관쯤 되는 직책이다. 무인이 아니다. 대종교인으로 총재부에서 나온 분이다. 대종교 탄압 사건인 ‘임오교변’ 때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했다. 글도 밝고 인격도 남달랐다. 연하의 김좌진에게 깍듯이 ‘총재 각하’로 호칭했다. 그의 이름은 이정, ‘북로군정서’의 양성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진중일지’를 작성한 주인공이다. 이정은 청산리전투에도 종군했다. 

 
전투기록에 나오지 않는 인물 중 부총재 현천묵, 그리고 고문으로 참전한 조성환, 김혁 등도 노구를 이끌고 종군했다. 김좌진과 이범석만 싸운 게 아니다. 편재된 간부들은 이름이라도 남기고 있지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군들의 희생이 ‘청산리대첩’이라는 단어 안에는 녹아 있다.

1920년 9월 17일 북로군정서는 피땀으로 다져 놓은 십리평을 뒤로하고 장정길에 올랐다. 서대파골 삼번목촌에서 첫 야영을 했다. 거기까지는 북로군정서 대원이면 몇 번씩은 오간 길이었다. 이제 서대파골을 벗어나야 한다. 일대를 서대파(西大坡)골이라 부른 이유가 다 있었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십리평 들판이 무인지경이었던 까닭에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는 유일한 곳이 서대파였다. 십리평 쪽에서 촌락을 찾아들거나 혹은 훈춘 지역에서 양수(양수천자라고도 함)를 지나 고갯길을 넘으면 닿는 첫 번째 마을이 서대파였다.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피곤에 절어 있던 한인들이 그나마 물 한 바가지, 온기 남은 조밥 한 덩어리라도 얻을 수 있는 동포마을이 서대파였다. 그래서 그 긴 골짝을 몽땅 서대파골이라 부르길 주저치 않았던 것이다. 아직도 북로군정서 주둔지를 그냥 서대파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시의 숙영은 개인 천막이 없었다. 민가가 있으면 신세를 졌고 없으면 노숙이었다. 바람막이 노릇이라도 할 수 있는 울타리가 있으면 우둥불을 지피고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먹는 문제도 그랬다. 지금처럼 치중 세트가 있을 리 만무했고 솥을 걸고 화목을 조달해야 했다. 그 많은 인원에게 장국 한 사발이라도 뜨끈하게 먹일라치면 몇 개의 솥이 필요했을까?. 당시까지만 해도 야영은 고조선 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좌진은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최대한 한인 동포들이 집거하는 마을을 고르되,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동로를 선정했다. 일단 출발하고 보자는 막무가내가 아니고 5월 이후 몇 번이나 검토하고 검토한 계획에 의해 움직였다. 연통을 이용해 사전 연락을 취하는가 하면 정찰을 통해 일본군과 중국군의 동태도 파악하며 움직였다. 물론 중국군이나 일본군도 첩자와 정보망을 통해 북로군정서의 이동을 파악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청산리대첩의 전장 외에는 교전 없이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대파에서 마반산을 끼고 장령(長嶺) 고갯길을 넘으면 흑웅동(현재 신흥동)이다. 흑웅동은 북로군정서 1개 지대가 주둔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묻어 둔 소총 50자루와 탄약 1000발을 파내 손질한 후 간부회의를 열었다. ‘대감자 간부회의’가 그것이다. 대감자와 흑웅동은 지척에 있는 인접 마을이다. 예전에는 그 중심지가 대감자였고 그래서 뭉뚱그려 대감자라 했다. 대감자 일대는 제3대대(대대장 임도준)가 서대파로 접근하는 적에 대해 장령 입구를 방어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보관해 두었던 비축무기를 수습하는 한편 총재부와의 차후 계획을 최종적으로 조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회의를 마치고 바로 새벽 2시에 출발을 한다. “북로군정서가 떠난 뒤 19일 오전, 일제가 파견한 중국인 밀정 2명이 사관연성소와 병영 11채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는 내용이 중국 기록에 남아 있다. 이제 다시 십리평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중국군의 동태가 심상찮았다. 김훈의 『북로아군실전기』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처음에는 아군이 다간즈(대감자)에 주둔하는 줄을 탐지한 적은 중국 길림성 고문으로 있는 짜이텅으로 하여금 중국군 200명을 일으켜 9월 8일 밤에 아군을 습격하기로 되었소. 적이 이런 암계를 꾸미고 제반 준비를 하는 줄을 탐지한 아군은 그날 밤 8시 반에 다간즈를 출발하여 10월 5일에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여 주둔하였나이다.” 기록상 시간과 일자의 차이는 있으나 그런 내용이다. 중국이 그렇다. 독립군의 이동에 협조하겠다고는 했으나 뒤집어버리면 그만인 약조였다. 일본의 압박에 대한 굴복이기도 했다. 더욱이 한·중 간의 교전, 그것도 북로군정서와의 교전은 일본이 가장 바라던 바였다. 김좌진은 대감자에서 떠나기로 했다. 애초에 대감자에서 주둔할 계획도 없었다. 그리고 서일 역시 밀산으로 북행에 올랐다. 하지만 김좌진과 서일 간에는 청산리전투 중에도 연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감자에서 김좌진은 또 한 가지 고민에 빠진다. 대감자에서 대기 중이던 무관학교 입학 지원자 50명의 처리 문제였다. 만주 일대에 명실상부한 무관학교가 생겼다는 사실은 청년들에게는 암울한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 한 줄기 서광이었고, 이들은 조국 광복의 최선봉에 설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생사를 넘나드는 이 길에 총 한 번 쏘아 본 적 없는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귀향을 거부했다. 결국 김좌진은 즉석에서 시험을 치르고 데리고 떠나기로 한다.

아직 교전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계획대로 백두산 지역에서 밀영을 조성하게 되면 사관연성소 2기생이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데리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기초군사훈련조차 못 받고 전선에 투입된 6·25 당시의 학도병과 다름없는 청년들이었다. 군복조차 제대로 보급되었을 리 만무했다. 추위와 허기 속에 서슬 퍼런 적들의 총검과 마주하며 생사를 넘나들 때 엄마 생각은 얼마나 간절했을까? 사령관도 선배도 목숨을 대신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난 뒤였다. 대감자의 어둠 속에 총기 부딪치는 달그락 소리만 따라 행군에 나선 그 소년병들 중에 살아남아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맞은 이는 몇 명이나 될까?

영웅적인 줄로만 아는 항일무장투쟁의 현실이 그랬다. 그 무명의 소년병들이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가? 밤마다 정화수 한 사발 떠놓고 아들이 온전하게 돌아오길 기원하던 엄마들의 정성을 양으로 잴 수 있는 일인가? ‘조국 광복’이란 무게가 그만큼 무겁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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