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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듯…세상 모든 것 ‘진짜’로 그려내다

기사입력 2019. 07. 03   17:02 최종수정 2019. 07. 03   17:18

23 사실주의 - 다게레오타이프, 칼로타입, 캐리커처, 바르비종파, 자연주의

식민지 정책·산업화·도시화 배경
1840년경 프랑스 사실주의 등장
카메라 영향 받아 있는 그대로 표현

 
7월혁명 후 언론 자유 확대로 활기
사회비판 풍자화 캐리커처 쏟아져
사회주의 영향 쿠르베 논란되기도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전시 거절 당해
밀레, 위험하지 않은 사실주의로 불려
유럽·미국 전역으로 리얼리즘 전파  


쿠르베, 돌깨는 사람, 1849, 유화 159x259㎝, 독일 드레스덴 국립미술관



루이 14세의 아카데미는 유럽 미술의 기준이자 바탕인 동시에 젊은 작가들을 양성하는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이른바 서사적인 역사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서 화가들을 일정한 틀 속에 가두어 놓기도 했다. 이성과 질서를 중시한 계몽주의는 신고전주의로 이어졌고, 이후 비현실적이며 격렬한 감정과 이국적인 주제를 다룬 낭만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점령과 경제 개발이 계속되면서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했고 혼돈과 새로운 질서가 교차했다.
식민지 정책, 산업화, 도시화가 이뤄졌던 1840년 프랑스에서는 자연을 단순하게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넘어 과학적·도덕적·정치적 확실성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진짜’로 그려내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프랑스 소설가 샹플뢰리(Champfleury, 1821~1889)는 미술과 문학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등장한 이 새로운 경향의 예술 현상을 사실주의(寫實主義, Realism)라고 명명했다.

이런 과학적 실증주의는 1830년대 등장한 카메라의 영향이 컸다. 프랑스의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1787~1851)는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라는 카메라를 가지고 자연의 이미지를 금속판에 새겼다. 영국의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 1800~ 1877)은 칼로타입(calotype)을 이용, 요오드로 코팅된 종이에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현대적 사진 공정을 실현했다. 사진은 사실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진은 ‘진실’이라는 사건을 구체화했다. 사진은 통치자에 의해 이상화된 예술의 전통을 깨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마네, 스튜디오에서의 점심식사, 1868, 유화, 118x153.9㎝, 뮌헨신회화관



사실주의는 1830년 프랑스의 7월혁명 이후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사회비판적인 저널리즘이 힘을 얻으면서 사건이나 사람의 모습을 익살스럽게 풍자한 그림, 즉 캐리커처(Caricature)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831년에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는 1534년 왕을 탐욕스러운 거인으로 묘사했던 라블레(Francois Rabelais, 1494~1553)의 『가르강튀아(Gargantua)』를 다시 펴내면서 소설의 삽화를 맡아 석판화(lithography)로 캐리커처를 출판했다. 왕을 모독한 혐의로 6개월간 감옥살이를 했지만 그는 군인들이 노동자 일가족을 살해한 장면을 그대로 묘사한 석판화 ‘4월 15일의 트랭스노냉 거리’(1834)를 발표하는 등 풍자와 고발을 멈추지 않았다.

풍자화에 위협을 느낀 정권은 곧 정치풍자를 금지하는 법을 공포했다. 하지만 도미에는 수십 년 동안 그림과 조각을 제작하면서 사회적인 이슈를 줄곧 다뤘다.

1848년 프랑스는 왕정을 끝내고 다시 제2공화국(1848~1851) 시대를 맞는다. 이 영향으로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제국, 네덜란드, 폴란드 등도 새로운 시대를 경험한다. 1846년 스스로를 무정부주의자(Anarchist)라 칭했던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 1809~1865)이 등장하고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가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1847) 『공산당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을 출간하면서 사회의 한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후 사실주의는 세상을 바로 보고 기록하는 시각적 언어로 자리 잡았다.



도미에, 가르강튀아,1831, 석판화, 파리국립도서관



프랑스의 정치권력, 부르주아 중심 사회, 역사화 중심의 아카데미를 공격하는 선봉에는 쿠르베(Gustave Courbet,1819~1877)가 있었다. 그는 1850~1851년 살롱에 ‘오를랑의 매장’을 출품해 사실주의의 포문을 열었다. 또 ‘돌 깨는 사람’(1849~1850)을 통해 중산층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1857년 살롱에 출품한 ‘센 강변의 숙녀들’(1856) 등으로 시대를 흔들었다. 마네(Eduou Manet,1832~1883)는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3)라는 도발적인 작품을 출품했다가 전시를 거절당하기도 했다. 이런 도발적인 그림들은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사실주의 작가들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쿠르베는 1855년 살롱 출품작이 거부당하자 살롱과 인접한 공간을 임차해 자신의 작품 40여 점을 무료로 전시했다. 이 행동은 그후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스스로 전시를 하는 계기가 됐다.

쿠르베의 행동과 그림의 혁명적 태도는 논란이 됐다. 특히 ‘돌 깨는 사람’은 인물의 윤곽선과 입체감을 거부하는 평면성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는 이후에도 “많은 부분이 부족하고 서투르다”는 식의 공격을 받았다. 마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두 작가의 그림은 더 거칠고 더 평평하며 더 윤곽선이 뚜렷한 형태로 나갔다.

쿠르베의 경우 사회주의에 경도된 화가였다. 하지만 모든 사실주의 화가들이 정치적인 지향점을 지니지는 않았다. 이들은 하층계급의 삶과 일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런 화가 중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의 존재는 특별하다. 농민들의 삶을 가감 없이 숭고하게 그려낸 그는 특별히 사실주의가 아닌 자연주의(Naturalism) 작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사실주의를 ‘위험하지 않은 대중적 사실주의’라고도 한다.

바르비종파의 원조인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1812~1867)의 존재도 중요하다. 그는 로맨틱한 정신이 지배하는 힘찬 터치와 밀도 높은 색채로 당대 풍경화의 대가로 등극했다. 특히 루소는 밖에 나가 스케치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화실에서 작업해 완성하면서 외광파의 원조가 돼 인상파의 탄생 동기를 제공했다.

바르비종파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사이를 이어주면서 인상주의자들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 특히 풍경화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봤다. 여성화가 로사 보뇌르(Rosa Bonheur, 1822~1899)의 존재감 있는 역동적인 그림도 출중하다. 어릴 적 부모님의 허락으로 동물들을 해부할 수 있었던 보뇌르의 집중적인 관찰력은 사실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리얼리즘은 유럽과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미국에서 파리에 와 작품활동을 하던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1834~1903)는 1860년대에 쿠르베와 교류하면서 사실주의에 입문했다. 하지만 그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해 도덕적으로나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다.

미국에는 19세기 미국의 단면을 가장 솔직하고 냉정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토머스 에이킨스(Thomas Eakins,1844~1916)란 걸출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사진을 연구해 작품에 반영하면서 매우 세밀한 관찰을 통해 외과 의사처럼 꼼꼼하게 모든 것을 묘사했다.

독일의 화가 빌헬름 라이블(Wilhelm Leibl,1844~1900)도 파리에서 쿠르베를 만나 사실주의자가 됐고, 뮌헨으로 돌아간 후 플랑드르 지방의 대가들이 이룩한 자연주의를 19세기로 옮겨와 적용시킴으로써 사실주의의 격을 높였다.

러시아의 레핀(Ilya Yefimovich Repin,1844~1930)도 육체 노동자들의 힘든 노동과 고된 일상을 포착한 사실주의 회화를 완성했다. 그는 파리를 여행하면서 인상주의도 경험했지만 인상파가 사회적인 일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주의를 고수했다. 사실주의 화가들은 대부분 집단이 아닌 독립적으로 활동했다. 그 때문에 해체나 해산 등의 과정 없이 서로를 알고 지지하면서 친구처럼 지냈다. 작품의 내용과는 달리 느슨한 형태의 미술사조였다.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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