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독립군에 대패한 일본군, 훈춘사건 빌미로 만주 침략

입력 2019. 07. 02   16:23
업데이트 2019. 07. 02   16:27
0 댓글

<25> 제3부, 북만주 황야에 서서 ⑨ 기지를 떠나다


日, 중국땅 진입할 명분 얻기 위해
영사관 방화 조작 대대적 선전
中 압박해 독립군 토벌활동 합의
일본 정규군 3만 명 몰고 만주로

 
中과 항일 전선 유지해 온 독립군
일본군 집요한 압력과 공작에
피땀 어린 기지 두고 떠날 수밖에

훈춘사건을 조작한 훈춘일본영사관.
훈춘사건을 조작한 훈춘일본영사관.


1915년 두만강을 코앞에 둔 왕청현 봉오동 골짜기에 3000여 평이 넘는 사설 군사기지가 들어섰다. 북로군정서 연성소가 십리평에 들어서기 4년 전이다. 1910년에 이미 그곳으로 조선인들을 불러 모아 상·중·하촌 농장을 개척한 이는 ‘최운산’이었다. 용정 명동촌이 생기기도 전에 연변에서 출생한 그는 중국어에도 능했다. 덕분에 청말에 중국군 장교가 되고 고위층과 안면도 넓었다. 동북 지역에 토지개혁이 시행되면서 도처에 황무지를 불하받았다.



그 땅을 개간하자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졸지에 연변 최고의 갑부 반열에 올랐다. 온갖 사업에도 손을 댔다. 축산, 미곡, 무역, 제면, 심지어 성냥, 비누공장까지 세웠다. 그러자 일제나 마적으로부터 재산과 조선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사병을 양성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이런 준군사집단이 숱했다. 장작림이 바로 이런 집단 출신이다. 이른바 ‘다퇀’(大團)이라 부르는 단체와 흡사한 형태다. 보호 대상이 있으면 다퇀이고 없으면 그냥 비적이었다. 그런데 최운산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사병집단을 다퇀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군으로 변모시켰다. 경술국치 때문이었다. 한 번도 살아 본 적도, 그에게 해준 것도 없는 조국이었지만 그는 중국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란 사실을 잊은 적이 없는 ‘된 사람’이었다. 1910년 봉오동에 자리를 잡고 전 재산을 독립군 양성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부대 이름을 ‘군무도독부’로 지었다. 그에겐 괜찮은 형이 있었다. 그 형이 봉오동전투에서 승전할 당시 부대인 ‘대한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일명 최명록)이다. 대한북로독군부는 최진동이 부장(府長), 안무가 부관(副官)이 되어 행정과 정치, 재정 등을 주로 담당했다. 홍범도는 그 산하의 정일북로제1군사령부(征日北路第一軍司令部) 부장(部長)이 되어 용병을 담당했다. 병력은 4개 중대로 편성했고 이천오(李千五)·강상모(姜尙模)·강시범(姜時範)·조권식(曺權植) 등이 중대장이었다. 북로군정서 이전, 가장 제대로 된 부대였다. 이회영·이상룡처럼 온전히 가산을 털어 일군 독립군 부대였다.


만주로 침입한 일본군의 주력부대 나남 주둔 19사단 병력.
만주로 침입한 일본군의 주력부대 나남 주둔 19사단 병력.


1920년 8월, 이 부대는 승전지이자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봉오동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가 북로군정서와 다르지 않았다. 국민회군도, 서로군정서군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중국군의 종용에 의해서가 아니다. 일본군의 집요한 압력과 공작에 기인한 일이다. 봉오동에서 대패한 일본 조선주둔군(자칭 ‘조선군’이라 하였음)은 이 시기 정규군 대부대를 간도 지역에 투입해 아예 독립군의 씨를 말리고자 획책했다. 이름하여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 읽기도 힘들고 외우기는 더 힘든, 일본다운 난잡한 제목의 토벌계획이 그것이다. 책임자는 용산에 앉아 있던 조선군사령관 ‘오오바 지로’였다. 그런데 그 내용에는 구실 만들기의 대가다운 계획이 포함돼 있다.

1920년 9월 12일과 10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훈춘 일본영사관을 정체불명의 마적이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것을 ‘훈춘사건’이라 부르는데 참으로 해괴한 사건이다.

1차 습격은 동녕의 노흑산지대에서 활동하던 만순이라는 비적이 그의 상급 비적두목이었던 코산의 지시로 일으켰다. 코산은 야마모토 기쿠코라는 일본 여인을 첩으로 거느릴 정도로 친일 비적이었다.

당시인 1920년 9월 16일 자 ‘길장일보’의 내용이다. “음력 8월 1일 아침 5시경 300~400명이나 되는 한 무리의 토비들이 갑자기 훈춘성을 포위하고 먼저 변방초소에 불을 지른 후 관은전호(官銀錢號), 현공서, 세무국, 전보국에 쳐들어가 재물을 약탈했다. 일본경찰서·영사관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토비들은 8시30분경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납치된 자가 중국인 80여 명, 한국인 6명이다. 현성의 손실은 수만조(吊)에 달한다.”

이 기사만 보면 일본영사관과는 하등 무관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게 사실은 일본군이 기쿠코를 통해 코산을 매수하고 코산은 만순을 시켜 훈춘의 일본영사관에 적당한 피해를 준 후 이를 기화로 병력을 동원하려 한 습격이었다. 그런데 눈치 없는 만순과 졸개들은 중국 관헌과 민간인들만 냅다 박살을 내버린 것이다. 실패였다. 일본은 집요했다.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2차 습격에는 다른 비적이 등장한다. 장강호라는 인물이다. 한편 중국의 자료를 보면 진동과 만순이 지휘한 비적이라고 돼 있다. 장강호면 어떻고 진동이면 어떠랴. 아무튼 이들은 10월 2일 오전 5시, 3문의 야포까지 쏘며 훈춘성을 공격했다. 이때 비로소 일본에 약간의 피해를 준다. 한국인 순사를 비롯해 사망자 14명, 중경상자가 30명이었다. 물론 습격 전, 돈 되는 것들과 영사관원 등은 모두 피신하고 영사관은 비어 있었다. 그 빈 영사관에 마적들은 불을 질렀다. 이게 훈춘사건의 실체다. 일제는 좋아라고 선전에 열을 올리는 한편 중국에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일본군은 이 사건이 단순한 마적이 아니라 다국적 과격파의 소행이라며 내전으로 골머리를 앓는 러시아의 참견을 차단하는 한편, 장작림을 압박해 잠정적 토벌 활동에 합의하고 중국 내로 일본군 정규군을 투입한다.

동원된 병력은 나남에 주둔 중이던 19사단을 주력으로 ‘포조파견군(浦朝派遣軍: 체코망명군의 철수 보호를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한 11·13·14사단의 명칭), 용산주둔 20사단, 관동군 등 만주지역을 둘러싼 모든 부대가 연합한, 말 그대로 전쟁 수준의 규모였다. 일본군은 10월 2일 오후 2시에 국경에 배치돼 있던 경원수비대를 비롯한 19사단 소속 병력을 훈춘 방향으로 침입시킨 것을 시발로 항공기까지 동원해 3만을 헤아리는 병력으로 물밀 듯 밀고 들어왔다.


블라디보스토크 시가지를 행진하는 포조파견군. 이들은 1920년 불령선인 초토화를 명분으로 북만주로 침략한 부대 중 일부다.
블라디보스토크 시가지를 행진하는 포조파견군. 이들은 1920년 불령선인 초토화를 명분으로 북만주로 침략한 부대 중 일부다.


훈춘사건이 일어나기 전 이미 5월에 편성된 ‘중일합동수색대’의 활동만으로도 중국은 우리 독립군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군과 마찰이 생길 경우 항일 단일전선이 무너지게 되는 데다, 그나마 우호적이던 중국군마저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국군으로서는 체면의 문제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김좌진이나 홍범도나 동포들의 피와 땀이 서린 기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제는 쫓기듯 조국을 등지고 건너간 만주벌에서까지 우리를 악랄하게 억압했다. 아무리 미래지향적 이웃 관계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일본의 짓거리에 화가 나는 것을 숨길 수 없는 필자는 소인배인가?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예비역 육군대령>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