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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영 병영칼럼] 꽃과 양자역학

기사입력 2019. 06. 24   15:59 최종수정 2019. 06. 24   16:01

  
노 인 영 
과학·미술 칼럼니스트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는 학자가 전 세계에 12명뿐이라고 말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리처드 파인먼이 한 말이다. 그러나 나는 칼럼 마지막으로 양자역학을 꺼내 들었다. 무모하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이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면 좋겠다.

기왕에 빼 든 칼, 임전무퇴(臨戰無退)다. 김춘수 님의 시 ‘꽃’으로 시작하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시가 던지는 은유다. 누가 이름을 부르든 말든 꽃은 꽃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시나 철학에 등장할 법한 이런 세상이 실재한다.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봐주는 관측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아주 작은 양자의 세계가 그것이다.

‘양자(量子·quantum)’란 1900년 막스 플랑크가 만들어낸 개념이다. 한마디로 ‘더 쪼갤 수 없는 에너지 덩어리’다. 그중 하나인 전자는 9.1095×10-31㎏의 질량을 지니고 있으면서 원자핵 주위를 돈다. 이렇게 운동을 계속하면 에너지를 잃고 회전 반경이 점점 줄어들면서 핵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마땅하다. 그러나 전자는 회전을 계속함에도 에너지를 상실하지 않는다. 닐스 보어는 전자의 이런 예외적인 현상이 특정한 궤도를 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과가 100g짜리만 있다고 상상하자. 그럼, 사과의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까? 200g, 300g, 400g… 즉 100g대의 특정 단위로 띄엄띄엄 존재한다. 단 단위와 십 단위가 없는, 즉 연속적이지 않은 세상이다. 전자의 궤도가 이와 같다. 따라서 전자가 다른 무엇과 상호 작용할 때는 높고 낮은 궤도 사이를 점프할 뿐이다. ‘양자도약’이다.

하이젠베르크가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이면서 과학계조차 큰 혼란에 빠졌다. 양자도약 대부분이 우발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입자의 위치를 알면 정확한 속도를 모르고, 속도를 알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불확정성 원리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많은 학자가 반발했다. 그들은 초기 조건을 안다면, 운동의 방향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인과(因果)의 세계를 원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아무리 기이하고 터무니없는 사건이라 해도, 발생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반드시 일어난다”는 물리학적 아이디어에 기초한다. 그리고 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이 불확정성을 계산하는 방정식을 내놓았다. 양자역학은 미시(微視) 세계에 실재하는 현상을 훌륭하게 서술한 것이다. 그리고 생활에 유용하게 사용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100년이 되었다. 트랜지스터, 컴퓨터, LED 등 오늘날 거의 모든 산업과 학문에 관계한다.

결국, 자연은 인간이 어찌 생각하든 괘념치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고 양자역학은 우리의 인지 범위가 얼마나 좁고, 자기중심적이었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부 유산이다.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일신(日新), 또 일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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