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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하는 체코군에게서 무기를 구입하다

기사입력 2019. 06. 18   16:24 최종수정 2019. 06. 18   16:30

<23> 제3부, 북만주 황야에 서서 ⑦ 한인 최강의 독립군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던 체코군
1차 대전 끝나자 한인에 무기 방매 


북로군정서, 러에 무기 운반대 파견
10월 혁명으로 옛 루블화 무용지물
동포들 금반지 등 모아 자금 마련
무거운 무기 품에 안고
낮에는 은신, 밤에만 걸어서 이동
국경 넘어 한 달여 만에 무사 귀대 


체코 망명군이 철수한 블라디보스토크항.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기 전 체코군단의 모습.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당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다. 체코 지역은 오스트리아 영토였으며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영토였다. 제국은 식민지인들을 징집했다. 일제가 우리에게 했던 그 짓과 다르지 않았다. 체코 징집병들은 가장 치열하고 열악했던 러시아전선 즉, 동부전선에 집중 배치됐다. 그러나 싸우러 가기는 했지만 생각은 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그리고 독일이 소속된 동맹군이 아니라 연합군 편에서 싸워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기회만 되면 러시아군에 투항했다. 어떤 부대는 의도적으로 집단 귀순하기도 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러시아는 아예 이들과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었다. 이들은 러시아 군복에 러시아가 제공한 무기를 들고 갈라시아 지방에서 자신들을 징집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싸웠다. 나중에는 프랑스·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웠다. 이들이 바로 망명군단으로 불리던 ‘체코군단’이다. 전쟁이 끝날 때 이들의 규모는 무려 6만이 넘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체코군단을 지원하던 ‘로마노프’ 왕조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2월 혁명’의 주 세력이었던 케렌스키 정부는 그래도 전쟁을 계속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10월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하자 독·오 등 동맹국들과 협정(브레스트-리토프스크)을 맺고는 전쟁에서 발을 빼버렸다. 서부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마저 버린 채. 그리고 내전에 빠졌다. 적군(赤軍)과 백군(白軍)은 동맹국과의 싸움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다.

러시아군에 소속된 체코군은 당혹스러웠다. 싸울 대상이 없어져 버렸다. 이때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 토마스 마사리크의 지침이 하달됐다. “러시아 내란에 휘말리지 말고 생명을 보존하여 서부전선(프랑스·이탈리아 전선)으로 이동하라.” 그들은 우선 북쪽으로 탈출을 모색했다. 그러나 내전 중인 러시아의 한가운데를 관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남쪽은 알프스였다. 결국 이들은 시베리아를 횡단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열차 수백 량을 구했다. 병력은 물론 무기, 식량 거기에다 병원과 은행에 우체국,신문사까지 이동했다. 볼셰비키에 우호적이지 않던 체코군단은 잔존하던 백계 러시아군의 보호와 연합군의 지원으로 무사히 시베리아를 횡단해 1918년 7월 6일 동쪽 끝에 도착했다. 그리고 볼셰비키군을 몰아내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다. 대사건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체코군의 철수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한 사실이다. ‘포조군’으로 부르는 이들은 뒤에 청산리전투에 참전해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일전을 치르기도 한다.

체코군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합국 선박들에 개방했다. 그리고 11월 11일 1차 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다. 체코군은 1년 이상을 머물며 선박을 구하는 대로 유럽으로 자원을 고스란히 실어 날랐다. 애초 체코군은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다. 그게 미제 레밍턴과 웨스팅하우스 소총 5만 정이었다. 러시아가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무기다. 물론 일부 러시아 모신나강 소총도 포함돼 있었다. 이때 지휘관이 ‘라돌라 가이다’ 장군이었다. 그는 일부 무기를 한인들에게 방매했다. 가이다는 훗날 임정을 방문해 안창호와 회담을 하고 독립군들에게 보여준 호의에 대해 감사의 선물도 받는 등 우리와 인연이 깊은 인물이다. 이 무기를 북로군정서가 구입하기로 한다. 당시로서는 최신예 무기였다. 맥심기관총의 경우 일당백의 무기였다.

다시 이정의 진중일기를 보자. 1920년 7월 5일 자 내용이다. ‘서무부장 임도준 각하는 러시아 출장 중이므로 동부 경신국장이 서리하다.’ 서무국장이 러시아 출장을 간 이유가 뭘까? 그랬다. 무기 구입 대금 지급 때문이었다. 그리고 7월 9일에 ‘무기운반대 2개 소대가 제1소대장 최원, 제2소대장 안상희, 감독 남진호의 영솔하에 러시아로부터 무사히 귀착하였다’를 시작으로 그 후에도 10여 회에 걸쳐 무기 운반 내용이 기록돼 있다. 특히 7월 23일에는 ‘무기운반대’로 무려 500명을 시급히 모집해 보내라는 서신을 접수했다는 것을 보면 무기를 성공적으로 구입했다는 소식이었을 터, 비록 모병을 서둘러야 했지만 김좌진은 신이 났을 것이다. 무기운반대는 9월 7일, 직접 러시아까지 갔던 서일이 조성환과 함께 무사히 귀대함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당시 무기운반경비대 분대장 ‘이우석’의 회고에도 나와 있듯 엄청난 노력과 인력이 투입된 작전이었다. 그냥 가진 돈으로 물건 사듯 그렇게 마련한 것이 아니다. 자금 조달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원래 준비한 돈이 옛 루블화였는데 혁명으로 휴지 조각이 돼 버렸다. 다시 신권을 모으기도 했지만 모자라는 돈은 동포들의 은비녀와 금가락지로 대신했다. 일본의 방해도 만만찮았다. 그뿐이랴. 수백 명의 운반대가 먹고 자는 것도 여간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한정된 한인부락에 산재해 있어야 하는 것은 참을 수 있다 치더라도 현지 동포들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이동 간 고생은 필설로 다 할 수 없었다. 이우석의 회고다.

“30여 명의 호위경비대로 무장한 200여 명의 무기운반대는 걸어서 훈춘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제정러시아가 망하고 화폐개혁이 실시되면서 구입 자금으로 가져간 구지폐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결국 다시 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자 시간이 문제였다. 동포들의 집에 기숙해야 했던 대원들은 한 달여 동안 식량 문제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새로 자금을 마련해 다행히 무기 공급에는 성공했으나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문제였다. 각자 서너 정의 무거운 무기를 품에 안고 산림을 헤치며 국경을 넘어야 했던 것이다. 체력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군과 소련군, 중국 마적의 감시를 피해야 했기 때문에 낮에는 은신하고 밤에만 움직여야 하는 긴장의 반복이었다. 이러한 험난한 과정을 거쳐 무기운반대는 드디어 병영에 도착했다.” 마침내 북만주 최강의 독립군부대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독자 제위께서는 십리평 들판, 서대파 개울을 가득 메운 무기운반대원들이 땀에 찌든 흙먼지를 씻어내며 우리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왁자그르르 떠드는 모습과 그 광경을 감격스레 지켜보는 김좌진이 그려지시는가? 독립운동은 그렇게 지난했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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