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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군사명저] “6·25전쟁은 스탈린이 기획한 ‘체스판’이었다”

기사입력 2019. 06. 16   14:17 최종수정 2019. 06. 16   14:41

기획, 현대 군사명저를 찾아서 II <22>

선즈화(Zhihua, Shen)

『마오, 스탈린과 6·25전쟁 : 1950년대 공산권 국가 삼각관계』

Mao, Stalin and the Korean War: Trilateral Communist Relations in the 1950’s



스탈린, 만주 이권 中에 돌려주고 한반도에서 발생할 내전 이용 결심 

전쟁 터지자 중공군을 방패로 미군의 ‘깊은 개입’ 전략적 유도

6·25전쟁은 미국에서 흔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여겨져 왔다. 1·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세계 패권 확립에 중요한 전쟁이었고, 베트남전쟁과 이라크전쟁은 미국에 잊을 수 없는 모욕과 패배감을 안겨준 전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6·25전쟁은 참전한 미군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참전용사들과 그들의 가족을 제외하고는 이를 기억하는 이들도 매우 적고 사회적인 주목도 받지 못했다.


6·25전쟁과 새롭게 공개된 사료들

사실 6·25전쟁은 2차 대전 이후 새로운 냉전 질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1991년 냉전이 종식되면서 학계에서는 6·25전쟁 관련 연구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냉전 종식과 함께 중국과 소련의 1차 사료들이 개방된 것이다. 이런 사료들을 잘 활용했던 학자들이 있다. 러시아 사료를 잘 소개한 캐스린 위더스비(Kathryn Weathersby), 중국 사료를 잘 소개한 천지안(Chen Jian), 선즈화(Shen Zhihua), 김동길 등이다. 그 중 선즈화 교수의 저서는 방대한 중국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6·25전쟁에 대한 많은 학술적 기여를 이뤄냈다.

1949년 12월 21일 스탈린(오른쪽)의 70회 생일에 초대돼 처음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 선즈화 교수는 저서 『마오, 스탈린과 6·25전쟁: 1950년대 공산권 국가 삼각관계』를 통해 6·25전쟁에서 최소 비용으로 최대 실익을 거둔 나라는 소련이었다고 주장한다.  필자 제공


6·25전쟁을 둘러싼 북·중·소 관계


본지에서 소개하는 선즈화의 책 『마오, 스탈린과 6·25전쟁: 1950년대 공산권 국가 삼각관계』에서는 북한과 중국, 소련 그리고 김일성, 마오쩌둥, 스탈린 간의 관계가 매우 복잡했음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의 6·25전쟁 승인의 원인을 중·소 간의 관계 때문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본 저서의 전반부는 마오쩌둥이 국공내전 승리 후 모스크바 방문 시, 스탈린에게 국공내전 말기 국민당 장제스와의 협상에서 얻어낸 만주에 대한 이권을 포기할 것을 요청하는 상황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다.

1장에서 6장까지 전반부는 모스크바에서 중·소 협상 시기인 1950년 1월, 소련이 만주에 대한 이권을 중국에 양보하는 과정에서 스탈린이 반대하던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왜 승인했는지 상세하게 기술한다. 즉, 스탈린의 생각이 만주의 이권을 중국에 돌려주는 대신, 한반도에서 발생할 내전을 이용하기로 바뀌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50년 1월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국제 상황이 변했다며,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관해 앞으로 논의해 보자는 서신을 보내면서, 남침 승인의 조건으로 미군 개입 시 중공군 개입 조건을 전제로 내세운다. 이러한 내용이 (중국의 의사 없이) 결정됐음을 알게 된 중국은 미군 개입 가능성에 대비해 김일성의 남침 이전에 압록강 북방에 중공군을 대규모로 전진 배치하게 된다.

본 저서는 미군의 개입을 스탈린이 예상했든 예상하지 않았든, 북한 인민군 남침 직후 한반도에 파병된 유엔군은 소련이 미리 계획한 전쟁 체스판에 들어온 체스 말이 됐음을 설명하고 있다.

체스판에 들어온 인민군, 유엔군, 중공군, 국군

본 저서의 후반부 7장에서 9장까지는 6·25전쟁 전반부부터 전쟁 중 중·소 간의 다양한 갈등과 협력관계를 다룬다. 스탈린이 중공군을 방패로 유엔군(미군)의 점차 깊은 개입을 유도하는 전략들이 시기별로 묘사된다. 결국 6·25전쟁 진행 과정은 스탈린이 계획한 전쟁 체스판에 북한 인민군, 유엔군, 국군 그리고 중공군이 차례대로 투입되면서 상호 전쟁을 치르게 된 것임을 설명한다.

정작 전쟁을 기획하고 뒤에서 조종하는 소련은 직접적인 개입 없이 안보적 이익을 거두게 된 것이다(물론 일부 후방에 있던 소련 군사고문단 및 소규모 소련 공군의 압록강 이북에 제한적 개입은 있었다).

결국 스탈린이 의도한 대로, 미군은 한반도라는 극동의 작은 지역의 내전에 휘말려 오랫동안 전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군이 극동 지역의 전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수록, 유럽에서의 미군의 군사력 증강과 공격 가능성은 작아졌다.

6·25전쟁으로 미군은 한동안 극동 지역에 매몰돼 유럽에 집중하지 못하게 됐다. 따라서 소련과 동유럽은 2차 대전 이후 경제 회복을 이루고 군사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즉, 소련은 6·25전쟁으로 체통을 구긴 것이 아니라 최대의 실익을 거둔 셈이었다.

소련 입장에서 6·25전쟁은 ‘당면한 적(미국)’과 ‘잠재적 경쟁자(중국)’를 싸우게 해 완전한 적이 되게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이 전쟁에 대한 희생과 비용을 소련이 아닌 약소동맹국 중국, 북한과 적국인 미국, 미국 동맹국, 대한민국이 지불하게 만든 것이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실익을 거둔 나라는 소련이었다.

6·25전쟁의 교훈과 오늘날의 한반도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말이 있다. 6·25전쟁은 중·소 간 관계와 한반도를 무력 통일하려는 잘못된 욕망에서 시작됐다. 결국, 전쟁을 지지하고 기획한 소련이 아닌 다른 나라들이 일종의 체스 말처럼 서로 싸우고 죽이는 희생을 치르게 됐다.

북한도 6·25전쟁 이후 동맹국에 이용당하고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를 겪게 됐고, 이에 따라 외국군에 기대지 않고 주체사상과 핵무기 개발에 집중하게 된다. 본 저서는 이렇듯 6·25전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아울러 오늘날 한반도 질서에 여전히 6·25전쟁이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저서다.
김영준·
국방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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