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김성수 평론가의 대중문화 읽기

甲이 아닌 선수 민원 수렴하는 乙이 되는…막내지만 교감 나눌 때는 거침없는…그들은, 눈높이가 달랐다

입력 2019. 06. 13   16:09
업데이트 2019. 06. 1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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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서열문화의 종말 : U-20 월드컵 결승을 만든 눈높이 리더십


정정용 감독,
선수 상황 파악 우선하고
그에 걸맞은 팀 색깔 만들어
시합 준비가 즐거운
원팀을 만들었다

 
이강인 선수,
형처럼 선수 움직임 지시하고
막내처럼 형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을 보여줬다


지난 12일 새벽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대한민국의 U-20 월드컵 대표팀을 응원하던 축구 팬들은 기적을 목격한 증언자들이 됐다. 사흘 전 거짓말 같은 명승부를 연출하면서 36년 만에 청소년 세계 4강에 오른 일만 해도 신화가 될 상황인데, 사상 최초로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국제대회의 결승에 오르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더욱이 대회 자체가 홈그라운드에서 펼쳐진 것도 아니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처럼 오랜 시간 팀을 만들도록 투자한 상황도 아니었으며, 성인 국가대표팀처럼 외국의 유명 지도자를 모셔 와서 만들어낸 결과도 아니었다. 팀에는 아마추어 선수가 둘이나 포함돼 있고,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하는 정우영도 데려오지 못해서 최고의 팀을 만들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런데도 결승 진출이란 성과를 냈으니 ‘기적’이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 결과를 놓고 다양한 분석이 진행됐지만, 어찌 보면 이 놀라운 결과는 팀을 만들고 성장시키는 데 근원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근원적 변화는 바로 서열(序列)문화를 종식하고 눈높이 리더십을 구현했다는 것인데, 그 리더십을 관철한 두 명의 인물이 바로 정정용 감독과 이강인 선수다.

정 감독은 언론들이 붙여준 수식어 그대로 ‘흙수저’ 출신이다. 영화 ‘기생충’식 표현을 빌리자면 반지하 인류다. 그는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프로선수 경력도 없다. 실업팀 이랜드 푸마 등에서 뛰다가 부상으로 29세에 일찌감치 선수 생활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짧은 선수 생활이 오히려 감독을 착실히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 대학원에서 생리학 박사까지 따면서 무려 10년을 준비했고, 2006년부터 대한축구협회 전임지도자로 활동하며 주로 유소년 선수 육성에 집중했다. 주로 낮은 연령대 대표팀을 지도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축구인들 사이에서는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사령탑으로 통해서 감독 대행, 임시 감독같이 어딘가에 공백이 생길 때면 위기를 수습하는 감독으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됐다.

물론 좋은 콘텐츠가 있다고 곧 좋은 감독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팀, 어떤 연령대를 맡겨도 제 몫을 해냈다. 그 비결은 선수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알맞은 팀의 색깔을 만들어내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는 것을 그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서열에 따라 군림하는 제왕이 아니라 선수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매니저가 돼야 하는 위치가 감독이다. 경기를 뛰는 사람은 감독이 아니라 선수들이기에.



이런 정체성을 가진 감독은 “내가 감독이니 내 말을 들으라”며 강요하고 누르는 갑(甲)이 아닌, 선수들의 민원을 수렴하는 을(乙)이 되는 것을 마다치 않는다. 이런 감독은 선수와 눈높이를 맞추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특기가 뭔지, 어떤 포지션에서 뛸 때 가장 행복한지, 어떤 카드로 활용할 때 가장 탁월한 기량을 발휘하는지를 잘 듣는다. 그리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전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축구는 팀과 선수에 따라 색깔이 달라졌고, 그와 함께 팀을 만들어본 사람들은 한 팀으로 시합을 준비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정정용 감독의 리더십을 비주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선수가 이강인이다. 그는 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 중 하나지만, 형들과 교감을 나눌 때 거침이 없다. 때론 그가 형처럼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을 지시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영락없는 막내처럼 형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에 따라 움직인다. 그야말로 수평적인 위치에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모습. 그것은 정정용 감독이 만든 팀 내 질서가 서열로 편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주는 장면이다.

사실 한 팀이라면 구성원들이 각자 특별한 역할들을 맡고 있고, 그것들 모두가 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들이며,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의 많은 ‘팀’은 이를 수직적 관계에서 상명하달식으로 관철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강인의 모습에서 확인한 것은 이번 U-20 팀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고’, 서로를 ‘보고’, 각자의 능력과 취향이 잘 파악돼 있는 상황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리 이강인이 초천재적 능력을 갖춘 선수라고 할지라도 달려오는 동료의 머리에 정확히 공을 맞혀주고, 앞서가는 선수의 발 앞에 공을 놓아주듯 하는 패스를 할 수 있었을까?

대한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모든 코칭스태프의 색깔이 하나로 어우러진 게 지금의 대표팀”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정정용 감독의 수평적 눈높이 리더십이 코치들의 능력까지 극대화했음을 의미한다. 또 결승골을 넣은 최준이 경기 후에 “강인이와 함께 밥을 먹으며 여러 얘기를 나눴는데 그 결과 눈빛이 맞았다”라고 한 인터뷰 역시 선수 사이의 수평적 리더십의 근간인 충실한 소통을 입증해주는 사례다. 이런 리더십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진보시키는 비결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야말로 잘못된 서열 ‘문화’를 종식해야 한다.

<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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