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김재철 기고] 영천지구 전투 유해발굴에 앞서

입력 2019. 06. 12   14:34
업데이트 2019. 06. 12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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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재 철 
육군50사단 영천대대장·중령
김 재 철 육군50사단 영천대대장·중령

영천지구 전투(1950.8.25~9.13.)는 국군 제2군단(제7, 8사단)이 북한군 제15사단의 공격을 격퇴하고 경북 영천을 탈환한 공격전투로 북한군 4000여 명과 국군 1800여 명이 전사했다. 1950년 9월 북한군은 영천을 점령한 뒤 대구에 진출해 낙동강 방어선 후방을 무너뜨리고 아울러 경주와 부산 방향으로 통로를 개방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지으려 했었다. 그러나 국군의 영천지구 전투는 적의 의도를 격퇴하고 이를 발판으로 인천상륙작전(9.15.)의 여건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고, 수세에서 공세로 전쟁 국면을 전환하는 데 이바지한 구국의 전투가 됐다.

6·25전쟁 3대 대첩에 들어가는 영천대첩의 중심에 자리 잡은 영천대대는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13회에 걸쳐 유해 398구와 유품 1만1460점을 발굴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7사단 5연대 전투지역을 4년 동안 집중 발굴해 유해 77구와 유품 2954점을 발굴했고, 그간의 공로를 통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수여하는 2018년 후반기 유해발굴 우수부대 표창도 받았다. 지역방위부대라는 특성상 예비군훈련 기간과 겹치는 발굴 기간과 평소 산악훈련이 없는 탓에 가파른 산악의 발굴지역은 부대원들을 쉽게 지치게 하고, 1년 넘는 기간에 발생한 간부와 용사들의 교체는 주된 제한사항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발굴 전부터 시작되는 국방부, 2작전사령부 유해발굴팀의 탐사와 그들의 정성 어린 지도, 발굴 현장에서 매일 시작과 끝에 진행되는 엄숙한 묵념, 발굴되는 유해와 유품들을 보면 불만 섞인 제한사항들은 한 위라도 더 찾겠다는 의지로 바뀌어 갔다. 특히 지난해 교복 단추와 벨트, 만년필 뚜껑, 안경 등의 유품이 발굴되면서 만년필 대신 총을 들고 군번도 없는 군인으로 전투에 뛰어들었을 학도의용군을 생각하면,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태어난 후예로서 그분들의 과거를 찾기 위해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다짐을 굳게 하게 됐다. 지난해 12월, 1954년에 드렸어야 했던 무성 화랑무공훈장을 6·25전쟁 참전용사분께 64년이나 지나고서야 대신 드린 일이 있었다. 참전용사(이명호·85세)의 연세가 이제 여든을 훌쩍 넘기셨지만, 그 당시 전투의 기억만큼은 선명하셨다. 그리고 내가 “늦게 드려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니 훈장 수훈자께서 “그때는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지… 이런 걸 바라고 싸웠던 게 아니었어. 지금이라도 이런 걸 주니 너무 고맙고”라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에 깊이 뭉클하게 남아있다.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산하에 약 12만4000여 위의 호국 용사가 잠들어 계신다. 이제 6월 17일이면 대대는 2019년 유해발굴사업을 시작한다. 선배 전우들의 말씀처럼 국난의 시기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위국헌신’의 결연한 의지로 고군분투하신 전사자들의 투혼에 존경을 표하며, 기간 중 한 위라도 더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겠다는 다짐으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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