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전투근무지원시설까지 갖춘 종합기지 구축

입력 2019. 06. 11   15:17
업데이트 2019. 06. 1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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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제3부, 북만주 황야에 서서 ⑥ 청춘의 끓는 피, 십리평 들판


총사령관 겸 사관연성소 소장 맡아
훗날 청산리대첩 영웅들 집중 영입 


병사용 막사·간부용 관사 만들고
인쇄소·피복-병기제조시설 갖춰
입영 자원자 받고 징병제도 운영
모든 병력 강도 높은 훈련 이수 


우수 인재 최정예 요원으로 육성
외국인 교관 초빙 선진전술 습득도
동포 독립 열망 ‘청산리대첩’ 이어져


왕청현 태평촌 뒷산 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사관연성소 막사 자리.
왕청현 태평촌 뒷산 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사관연성소 막사 자리.
일본군이 기록으로 남긴 사관연성소 요도. 하단부의 4각형들이 막사다.
일본군이 기록으로 남긴 사관연성소 요도. 하단부의 4각형들이 막사다.

당시에 서대파는 한 장소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왕청에서 훈춘 방향으로 향하는 긴 골짜기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지금은 입구 마을을 서대파촌이라 부른다. 1919년 여름철에서 1920년 9월에 이르는 시기 서대파 골짜기는 그곳에서 땅이 열린 후 가장 뜨거웠고 그 열기는 그날의 청년들이 떠난 후 다시 피어오르지 않았다. 김좌진이 ‘고각흔천동사린(鼓角흔天動四隣, 하늘을 흔드는 고각 소리가 천지로 위세를 떨친다)으로 표현한 그 열기, 정열이 지금 우리에게 전승되고 있는가? 기꺼이 독립전쟁에 목숨을 던지던 선배들을 기억하는가? 

 
총사령관 김좌진은 직접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 소장을 겸했다. 그리고 참모와 교관들을 모았다. 이미 신흥무관학교에서부터 눈여겨본 인재들이다. 당대 중국 최고의 명문 운남강무학당 출신의 교관 이범석을 비롯해 박영희, 백종열, 강화린, 오상세, 이강훈, 김훈 등 청산리대첩의 영웅들이 이때 집중적으로 영입됐다. 그뿐만 아니라 조성환, 이장녕, 나중소 등 대한제국에서부터 잔뼈가 굵은 최고의 전문가들도 불러들였다. 이상룡으로부터 교재와 교범도 지원받았다.

막사도 세웠다. 그 장소가 서대파골 내의 십리평 일대이며 십리평을 마주보는 언덕바지 ‘홍송강(현재는 태평촌)’에 사관연성소 막사를 조성했다. 병사나 사관생도는 귀틀집에다 캔버스 천에 기름을 먹인 천막으로 지붕을 만든 집단 막사였으며 간부들은 별도의 주거 관사를 두었다. 당시의 모습은 일제의 정탐기록과 중국의 기록에도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가옥의 구조는 중국식 6칸짜리 5채, 5칸짜리 2채를 만들어 1채는 사무소로 쓰고 1채는 노동자들의 숙소로 사용했으며 나머지 5채는 전부 군인들이 들었다. 그 1채의 길이는 60자, 폭 20자로 구조는 밖으로 둥근나무를 조합한 것이지만 간격 없이 되어 널판 벽으로 대응됐다. 천장은 두꺼운 풍천을 펴서 중앙을 높게 하여 비가 새는 것을 방지하는 천막식이다. 아울러 조선식 초가집 15칸이 더 있으며, 민가 15칸을 추가로 빌려 쓰고 있다.” 생도 막사를 기준으로 60자 길이 혹은 6칸 반이면 20m 정도의 길이가 된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규모의 막사였다.

한편 각종 물품 조달을 위한 군수지원시설도 함께 세웠다. 김좌진의 비서였던 ‘이정’이 기록한 ‘진중일지’ 내용을 살펴보면 그 종목의 다양성이 놀랍다. ‘군모 제조가 시급하여 재봉기 1좌 혹은 2좌를 거듭 운송하고 재봉수 이송학을 먼저 파견’한 사실을 보면 피복 제조 시설을 구비하고 있었다. 또 ‘육군형법과 동 징벌령 40부를 인쇄실에 명령하여 수선’한 사실이나 ‘본영으로부터 각 지방에 통행하는 증서 600매를 인쇄’한 것을 보면 인쇄소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총검을 제조하려 하니 강철 200근을 구입해 보내라’고 한 것을 보면 최소한 도검 정도는 충분히 제작할 수 있는 병기 제조 공장까지 갖췄다. 십리평은 단순한 훈련 장소나 주둔지가 아니라 전투근무지원시설까지 갖춘 종합기지였던 것이다. 이런 체계를 갖춘 독립군 단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십리평을 피와 땀과 눈물로 적시던 청년들을 모으기 위해 자원자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징병제도 같이 시행했다. 관할 구역 내 30호를 1구로 하여 18세 이상 35세 이하의 청장년을 대상으로 자원자는 결사대원으로 선발하고 나머지는 일반 보병으로 선발, 먼저 500명의 ‘독립군부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나머지 600여 명은 보충병 및 대기병으로 분류해 일단 경호 병력이 되게 했다. 그러나 모든 병력은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오전 훈련을 하고 다시 오후 2시부터 야간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이수해야 했다. 훈련 과목은 오전에는 주로 제식훈련과 전투훈련, 오후에는 사격술·총검술·총기사용법 등의 수업이 진행됐다. 육군훈련소를 연상해 보면 된다.

이들 중 특히 중등 이상의 학력을 지녔으며 체력이 좋고 사상이 투철한 대원들은 사관연성소 사관생도로 입교시켰다. 그들을 장교로 모두 임관시키진 않았지만 예비장교 신분으로 ‘연성대(교성대·여행대라고도 했다. 이범석과 김훈은 주로 여행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로 불리는 별도 편제를 두고 최정예 요원으로 육성했다. 교육 기간은 당시의 긴급한 상황을 고려해 6개월의 속성 과정으로 진행했다. 교육 과목도 일반병사들과는 달리 정신교육, 역사, 전술학, 지휘법 등이 추가됐다. 그뿐만 아니라 실전적인 종합전술 훈련도 시행했다. 김좌진은 선진전술을 습득하기 위해 외국인 교관도 초빙했다. 한인이지만 러시아 국적의 강필립이나 중국 무관학교 출신 장교들도 초빙했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1920년 6월 현재 사관연성소에서 훈련을 끝낸 독립군 병사가 600여 명이고 장래 독립군 사관이 되기 위해 상등병의 견장을 붙이고 훈련 중인 사관생도가 약 300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관연성소 필업식이 9월 9일임을 감안하면 보충병이나 대기병들이 기수별로 지속적으로 훈련에 임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들을 포함해 청산리대첩 당시 북로군정서 대원의 총수는 대략 1500여 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인원이 모두 청산리대첩에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북로군정서의 편제는 소대-중대-대대로 이어지는 한국군 편제와 같았다. 다만 소대 규모가 50명 단위였고 2개 소대를 1개 중대, 4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하여 총 4개 대대가 편성됐다. 그렇게 본다면 북로군정서 총인원은 1600명 이상이란 산술적 계산이 나오지만 완전 편성은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용사들이 항일 무장투쟁사의 금자탑 ‘청산리대첩’의 주인공이 된다.

국가 차원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의 해외 망명 무장단체가 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이롭지 않은가? 당연히 김좌진 혼자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위로는 백포 서일이 있었고 석주 이상룡 같은 선배들의 지지와 성원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소중한 사실은 독립을 향한 동포들의 열망이었다. 나라를 되찾자고 군량미로, 군자금으로 피땀 흘려 거둔 알곡 한 줌, 엽전 한 푼을 흔쾌히 내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금쪽같은 내 자식까지 기꺼이 독립전선에 내보내 준 그때, 그 동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김좌진의 지도력과 그런 모든 것들이 녹아 있던 곳이 그날의 십리평이었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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