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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석권 히틀러 “동쪽으로 게르만족 터전 확장”

기사입력 2019. 06. 11   16:17 최종수정 2019. 06. 11   16:21

<71> 1941년 6월 히틀러는 왜 소련을 침공했을까?(上)

히틀러, 독일 경제 불황 위기 이용 집권
서구 전승국 유화적 대응 야욕 부추겨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후 폴란드 점령
프랑스 항복 받아내고 전격 소련 침공
  

나치의 대중집회 장면.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으로 1941년 6월부터 1945년 4월까지 벌어진 독일과 소련 간의 전쟁을 꼽을 수 있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으나 소련의 스탈린은 느긋했다. 전쟁이 터지기 불과 일주일 전에 독일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폴란드의 절반을 전리품으로 챙길 수 있다는 밀약을 이미 받은 터였다.


독소(獨蘇)불가침조약 체결 소식이 세계에 알려진 직후 어느 만평은 히틀러를 신랑으로, 스탈린을 신부로 묘사했다. 그동안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상호 비방하던 독일의 나치즘과 소련의 볼셰비즘이 갑자기 밀월 단계로 접어든 것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두 이념의 결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암호명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으로 소련을 전격적으로 침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이 시점에 소련을 공격했을까? 다양한 루트의 사전 경고에도 불구하고 왜 스탈린은 독일 침공에 대비하지 못했을까? 이후 독소전쟁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양국의 충돌이 2차대전의 전체 전황과 이후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답을 구하려는 한 시도다.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에서는 한동안 서방 전승국 중심으로 국제연맹 창설, 군축회담 개최 등 평화 재건을 위한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로 대변되는 파시스트 정권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이들은 ‘영광스러운 민족국가’ 건설을 명분으로 내걸고 강력한 개인적 카리스마를 토대로 무자비한 독재권력을 구축했다. 국내 정권을 장악한 이들이 1930년대 중반 이래 주변국에 대해 노골적으로 침략 본성을 드러냈으나 서구 전승국들은 고립주의적인 분위기 아래 유화적인 대응으로 일관했다. 그 결과 기고만장한 이들의 침략으로 인해 세계는 재차 대(大)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독일군의 전격전 모습.

 
양차 대전 기간 중 유럽에서 대두한 우익 성향의 독재체제인 파시즘(Fascism)은 전후 이탈리아에서 맨 먼저 출현했다. 종전 후 극도의 혼란에 처했던 이탈리아 상황은 파시즘 태동에 비옥한 토양이 됐다. 파시스트 체제의 첫 실권자는 무솔리니였으나 이를 극단으로 몰고 간 인물은 독일의 히틀러였다.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무명(無名)이던 히틀러를 유력 정치가로 키워준 일등공신 역시 전후 독일사회의 극심한 혼란이었다.

독일은 패전국이었기에 종전 후유증은 더욱 심했다. 독일을 전범자로 규정하고 천문학적 배상금을 부과한 베르사유조약에 대한 불만이 엄청났다. 특히 전후 독일군에 강요된 대폭의 군비 축소는 군부의 불만을 초래했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극심한 초(超)인플레이션으로 의회주의의 기반인 중산계층이 무력화됐다. 전쟁 패배로 호엔촐레른 왕조가 몰락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했으나 자유민주주의는 겨우 걸음마 단계였다. 집권한 사회민주당의 약체성으로 정국은 혼미했고, 설상가상 정권탈취를 노린 소요사태가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빈번하게 일어났다.

전후 독일의 불안정한 정세는 ‘외로운 늑대’ 히틀러에겐 호기로 작용했다. 제대 후 그는 제2의 고향이랄 수 있는 남부도시 뮌헨을 거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우선,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을 모아 나치당을 창당(1920)한 후 베르사유조약 파기, 독일 민족 단결, 유대인 추방 등 과격한 구호를 외치며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뮌헨폭동(1923. 11.) 실패 후 히틀러와 나치당은 쇠락의 길을 길었다. 때마침 독일 경제도 점차 회생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안정되기 시작했고, 그와 반대로 나치당 같은 과격 정당의 앞날은 어둡게 됐다.

그러나 1929년 10월 터진 세계 대공황은 미국의 단기차관에 의존하던 독일 경제에 충격을 가했다. 경제구조가 무너지고 실업자가 넘쳐나면서 독일인들은 재차 나치당의 과격한 외침에 솔깃하기 시작했다. 경제 불황으로 조성된 위기 상황을 이용해 기사회생한 나치당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1932년 제1당 자리에 올랐다. 히틀러 자신은 대통령 선거에서 2위에 오르며 일약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정치가로 부상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견제로 잠시 주춤했던 히틀러가 드디어 1933년 1월 44세로 내각 수반으로 임명됐다. 그는 곧 대중의 열광적 환호 뒤에 감춰온 폭력적 본성을 거침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취임 직후 히틀러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라는 정치공작을 벌여 공산당을 비롯한 반대 세력을 무력화했다. 이어 돌격대 지도부에 대한 피의 숙청을 감행해 당내 도전세력 제거 후 총통에 취임(1934.8.)했다. 이제 강력한 공업국이자 잠재적 군사강국인 독일의 입법·사법·행정 삼권이 오스트리아의 미술지망생이던 히틀러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제 일찍이 『나의 투쟁』에서 천명한 목표들을 현실화하는 방향으로 점차 발걸음을 내디뎠다. 라인란트 진주(進駐)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합병(1938.3.), 체코 주데텐란트 합병(1938.8.) 등 독일 주변 영토를 야금야금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파시스트들의 침략정책에 서구 전승국들은, 뮌헨회담(1938.9.)에서 엿볼 수 있듯이, 적극적인 대응보다 요구를 묵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당연히 독재자들의 침략 야욕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급기야 동유럽에 이해관계가 깊은 소련의 불만과 의구심을 초래해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겨진 나치즘과 볼셰비즘이 손잡는 의외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이 체결(1939.8.23.)된 것이었다. 양 전선에서의 동시 접전이라는 고질적인 ‘방위 트라우마’를 해소한 히틀러가 폴란드 땅을 짓밟는 일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1939년 9월 1일 기어코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이날 독일군은 국경에 놓인 차단봉을 제거한 후 물밀 듯이 폴란드로 쳐들어갔다. 2차 대전이 불붙은 것이었다.

폴란드 국경을 넘은 독일군은 거침없이 진격했다. 폴란드군이 사투를 벌였으나 정신력만으로는 우월한 무기체계와 ‘전격전’이라는 창의적인 전투방식으로 무장한 독일군을 상대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폴란드군은 동부전선에서 밀어닥친 소련 적군(赤軍)의 공격마저 막아내야만 했다. 독일군은 불과 3주 만에 폴란드의 서쪽 절반을 차지할 수 있었다.


독소(獨蘇)불가침조약을 풍자한 삽화.

폴란드 점령 후 약 6개월 동안 재정비를 마친 독일군은 1940년 5월 서부전선에서 본격적인 공세작전을 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국경선에 구축한 마지노선을 과신하던 프랑스군의 예상과 달리 독일군은 특유의 기동전으로 개전 초반부터 프랑스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독일군 기갑사단의 빠른 진격에 쫓긴 약 33만 명의 연합군 병력은 도버해협에 연한 벨기에의 한 항구도시로 내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른바 ‘덩케르크 철수’ 이후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가 항복(1940.6.22.)했다.

이후 영국 침공에는 실패했으나 서부 유럽을 석권한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생활공간 확보라는 숙원을 실현하는 과업에 착수했다. 눈을 다시 동쪽으로 돌려 1941년 6월, 소련 침공을 결행한 것이다. 이제 20세기 최고의 악한으로 꼽히는 히틀러와 스탈린 두 독재자의 세기적 대결의 장이 펼쳐졌다. 이는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끝나는 ‘막장 게임’이었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자료=필자 제공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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