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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 지형 서대파 십리평에 진영 구축하다

기사입력 2019. 06. 04   16:11 최종수정 2019. 06. 04   16:21

<21> 제3부, 북만주 황야에 서서 ⑤ 대한민국 국군의 탄생지

부대 양성 최적의 입지 조건 4가지
① 강한 훈련·안전 보장
② 군량 확보 가능한 논밭
③ 우호적 동포사회의 지원
④ 광복 향한 진군 전초기지

 
긴 계곡 중간에 자리 잡은 십리평
뒤로는 절벽 같은 산 둘러져 있고
수십 호 부락 옹기종기 모여 있어
지리적으로 공격 어려운 최적지  

김좌진이 직접 지형 정찰 후 훈련장으로 선정한 십리평 들판.

  
군벌의 발호와 이념의 혼재 속에서 반란군 형태로 탄생한 중국군의 표지에는 ‘八一’이라는 숫자가 어디에든 들어가 있다. 이는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일인 1949년 10월 1일 만큼이나 성역에 속하는 상징이다. 1927년 8월 1일 중국 강서성 남창시에 주둔하던 주덕 지휘하의 국민혁명군(국민당군) 일부가 공산당 지도 아래 무장폭동을 일으킨다. 이를 ‘남창폭동’이라 칭한다. 이 군대가 중국 홍군의 씨앗 노릇을 하는데 중국은 이 군대를 효시로 보고 이날을 창건일로 획정하고 있다. 그리고 주덕을 ‘홍군의 아버지’로 기린다. 우리는 어떤가?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라는 꼬리표가 붙긴 했지만 우리도 공화주의를 표방한 ‘정부’를 상해에서 수립했다. 노령에도, 한성에도 임시정부를 표방한 단체가 있었지만 9월 15일 상해를 중심으로 단일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임정에는 지금의 국방부인 군무부도 있었다. 초대부(총)장은 이동휘가 맡았고 군제도 만들었다. 1년을 채 못 버티긴 했지만 직할로 ‘광복군사령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지휘·통제할 힘이 없었다.

다행히 남만주에서 이상룡이 주도하던 신흥학교를 중심으로 신민회가 ‘서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꿔 임정 휘하임을 자임했고, 김좌진이 양성하던 북만주의 ‘대한군정부’도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로 격을 낮춰 참여했다. 임정과 무관하게 만들어졌지만 기꺼이 임정 휘하로 부대를 소속시킨 대인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외교독립론에 기반을 둔 상해 임시정부에 실재하는 무장력 즉, 군대가 생긴 것이다.

이는 상호 타협 하에 말로만 적당히 한 것이 아니다. ‘북로군정서’의 경우에도 상해임시정부가 통일된 정부로 명실상부하게 발족된 후 1919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령 205호’에 의거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로 명칭을 확정했다. 다시 말해 상해 임시정부의 군대였다.


왕청현 서대파. 현재는 한 개의 부락을 지칭하나 당시에는 이 골짜기를 지나는 연선 전체를 일컫는 지역명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돼 있다. 임정이 뿌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국군의 뿌리 또한 자명해진다. 의병과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에다 법통까지 부여받았다면 당연히 대한민국 국군의 출발은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여야 마땅하고 그중 최정예군이었던 ‘북로군정서’는 국군의 자부심이어도 손색이 없다.

그 탄생지가 바로 북만주 ‘왕청현 서대파’ 지역이다. 덕원리가 조국 광복의 꿈을 키우는 곳이었다면 서대파는 그 꿈을 실현시켜나가는 곳이었다. 병영을 세우고 병력을 주둔시키는 것도 그러하지만 사관생도를 양성해야 하는 곳이라면 더욱 지형적 조건이 중요하다. 특히 당시 상황을 보면 1년 남짓 지내다가 이동할 임시 주둔지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조국광복을 향한 대진군’이라는 미래를 바라보고 그 전초기지로 택한 주둔지 즉, 통합 캠프였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훈련을 보장하되 안전 또한 담보할 수 있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군량을 자체 확보할 수 있는 논밭도 필요했고 우호적인 동포사회가 편의를 제공해 주는 곳이어야 했다. 김좌진은 최고의 부대 양성을 위한 최상의 장소를 찾아 덕원리를 중심으로 그 일대를 모두 정찰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적의 장소를 찾아냈다.

대단하다. 변변한 지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군사훈련에 적합한 지역을 어디에다 물어볼 수도 없었다. 먼저 이 지역을 찾은 구춘선이나 이동휘도 발견하지 못한 곳이었다. 김좌진이 육군대학을 졸업해 ‘주둔지 선정 시 고려 사항’ 같은 걸 배웠을 리도 없다. 오로지 경험에 바탕을 둔 지혜로 판단했다. 현장에 가보면 안다. 그 탁월한 혜안을.

『철기 이범석 자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 장군이 나더러 군사를 훈련시킬 곳을 물색해 놓았으니 답사하자고 하시기에 같이 말을 달렸다.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이란 곳이었다.(중략) 계곡 길이가 100여 리나 되고 계곡 중간쯤 올라가면 십리평이란 동네가 있다.(중략) 서대파에 들어서니 초입에는 좌우 산이 높지 않았으나 들어갈수록 경사가 급해졌다. 거의 절벽에 가까운 산이 양쪽으로 병풍을 둘러친 듯 높이 솟은 채 100여 리의 장곡을 이루었다. 그 계곡의 너비는 좁은 곳이 3, 4리 넓은 곳은 약 7, 8리나 되었다. 거기에 조그만 강이라 해도 좋을 만한 넓고 깊은 물골이 있다. 4, 5리 혹은 10리를 격해서 수십 호의 부락이 옹기종기 펼쳐져 있고 부락 주변만 벌채했을 뿐이다. 길이라 해야 본래 계곡에 보행하는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았는데 넓게 새로 깎아 닦아 놓았다.”

일본군의 기록이다. “북쪽은 노령 연추 지방으로 통하며 남쪽으로는 약 14, 5리 양수천자 방면으로 통하는 교차점에 위치하여 지리상 어디로부터 공격해도 어려운 장소다.” 지금도 십리평 일대의 지형은 들어가 보면 아늑한 곳이지만 찾아 들어가는 적의 입장에서는 난공불락이다. 마침내 서대파 십리평 지역에 진영을 구축한 김좌진은 그 안전성이 보장된 만큼 훈련과 군사력 강화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멋진 시 한 수를 남겼다. 10년이 지난 뒤 그의 친척 김홍진이 당시의 시 ‘산영월하 마도객’이란 시를 기억하고 있다며 구술했다.

“대포소리 울려 퍼지는 곳에 봄이 오니(砲雷鳴送萬邦春)/ 청구 옛 땅에도 빛이 새로워라(大地靑丘物色新)/ 달빛 아래 산영에서 칼을 가는 나그네(山營月下磨刀客)/ 쇠울타리 바람결에 말을 먹이고 서있네(鐵寨豊前말馬人) 중천에 펄럭이는 깃발 천리에 닿은 듯(旌旗蔽日連千里)/ 하늘을 흔드는 군악 소리 사방으로 위세를 떨치네(鼓角흔天動四隣)/ 와신상담으로 벼른 십년 세월(十載臥薪嘗膽志)/ 현해탄 건너가 원수를 무찌르세(東浮玄海掃腥塵)”<1 >


<각주>
1동아일보, 1930년 2월 16일 자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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