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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우국충정이었지만… 대륙의 주인이 바뀌었다

기사입력 2019. 06. 04   16:19 최종수정 2019. 06. 04   16:24

<70> 1936년 12월 장쉐량은 왜 시안(西安)에 온 장제스를 감금했을까? (下)

일본에 고향 동북지역 뺏긴 장쉐량
내전중지·거국항일 여론 등에 업고
일본에 소극 행보 장제스 체포·감금
홍군, 정부군으로 편성 세력 급성장
일본 항복 후 4년여 내전 끝에 승리


장쉐량이 장제스를 감금했던 중국 시안의 화칭츠(華淸池).



전개 과정
그렇다면 이러한 세기적 모험을 감행한 장쉐량은 누구며, 그는 왜 이러한 모험을 택했을까? 그는 20세기가 막 개막된 해(1901)에 중국 동북지방 랴오닝성 태안현에서 곧 동북 군벌로 유명해지는 장쭤린(張作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각별한 관심 아래 장쉐량은 유년 시절부터 유학(儒學)에서 서양 신식 학문까지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익혔다.
영국인 가정교사를 통해 영어도 배웠다. 원래 의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부친의 권유로 1916년 부친이 전문적인 무관 양성을 위해 건립한 강무당에 입교(1919~1920)해 군사교육을 받았다. 1920년 강무당을 졸업한 장쉐량은 여단장·사단장 직책을 거치면서 인접 지역 군벌과의 수차례 싸움에서 승리하는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1926년 장제스가 북벌을 개시할 즈음 마침내 장쭤린은 베이징에 근거한 직예파 군벌을 물리치고 중국 동북부 지역 장악에 성공했다. 그런데 긴 혈투 끝에 만주 기반 동북 군벌의 시대가 꽃을 피우려는 찰나에 장쉐량 일생에 전환기를 가져온 의외의 일이 터지고 말았다. 1927년 산둥반도로 출병해 야금야금 세력을 넓혀오던 일본군이 걸림돌로 여긴 만주의 실세 장쭤린을, 1928년 탑승 열차 폭파사건을 일으켜 살해한 것이었다. 졸지에 부친을 잃은 장쉐량은 이제 동북 군벌의 총수로 만주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떠올랐다.

그런데 1931년 9·18사변을 빌미로 일본군이 노골적으로 만주를 침략해 차지했다. 그동안 만주를 본거지로 성장한 장쉐량의 동북 군벌은 이제 보금자리를 잃고 중국 본토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 장제스의 난징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휘하 부대를 이끌고 만주를 떠나 중국 서북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후 잠시 유럽으로 외유를 떠났다가 돌아온 장쉐량은 1934년 초 장제스에 의해 국부군의 공산당군 토벌 책임자로 임명돼 자신의 동북군을 이끌고 중국 내륙의 시안에 머물면서 옌안에 둥지를 틀고 있던 홍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안 사변’을 일으킨 장쉐량.

그런데 문제는 그가 줄곧 심중에 품고 있던 항일 의지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중국인들끼리 내부에서 싸우는 것을 중지하고 서로 힘을 합해 외세인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자는 것이었다. 그와 그의 부하 대부분은 일본군의 수중에 있는 만주에 근거지를 갖고 있었기에 다른 어느 부대보다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고 일본군과의 일전을 갈망하고 있었다. 더구나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화북지방을 장악하고 괴뢰정부를 세운 일본이 계속 국민당 정부를 압박하면서 호시탐탐 중국 본토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침탈에 대응해 지식인과 학생을 주축으로 ‘내전중지’ ‘거국항일’ 여론이 중국인들 사이에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여론의 동향과 달리 장제스는 ‘선안내 후양외(先安內 後攘外)’를 내걸고 일본 침략에는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우선 국내에서 공산당 세력을 일소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정책 노선에 대해 점차 국부군 내부에서조차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시안에서 공산당 토벌군을 총지휘하던 장쉐량의 행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홍군과 벌인 일련의 전투에서 연달아 패배한 장쉐량과 그의 동북군 장병들은 이러다가 만주 수복이 영영 불가능하리라는 조바심에 휩싸였다.

이러한 틈새를 국민당 군대의 서북군 총책이던 양후청(楊虎城)과 무엇보다도 공산당 수뇌부가 파고들었다. 자신에게 동조한 양후청의 조언을 받고 1936년 4월 장쉐량은 마오쩌둥의 오른팔이자 공산당 대외업무 책임자인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비밀리에 회동했다. 공산당 측은 거국적인 공동 항일투쟁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장쉐량·양후청과의 대화 채널을 계속 가동하면서 국부군의 내부 분열을 획책했다. 당시 국부군에 의해 험준한 산악지대인 옌안(延安)에 포위된 채 간신히 연명하고 있던 홍군 처지에서는 ‘내전중지’야말로 최상의 카드였다. 전방위적인 설득 작업이 성공해 1936년 가을부터 국부군은 홍군에 대한 공격을 중지한 채 시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몸이 달아오른 것은 수도 난징에 있던 총사령관 장제스였다. 이제 최후의 일격을 가할 경우, 골칫거리인 공산당 세력을 섬멸하는 것은 시간문제인 절호의 시점에 최전방에서 토벌의 총책을 맡은 장쉐량과 그의 막료들이 공격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1936년 12월 초, 장제스는 주변의 만류에도 10월 방문에 이어서 재차 시안행 군용기에 몸을 실었다. 직접 현장에 가서 장쉐량을 만나 공격작전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믿었던 장쉐량이 자신을 배신할 줄이야 장제스가 어찌 꿈에라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런데 실제로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이 시안 사령부를 방문한 상관이자 존경하는 지도자인 장제스를 예하 특공대 병력을 동원해 체포·감금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이 난데없는 소식에 중국은 물론 전 세계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일대 충격에 빠진 난징의 국민당 정부와는 반대로 험지인 옌안에 웅거한 채 마지막 전멸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수뇌부와 홍군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시안 사변을 계기로 이듬해 성사된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1937년 9월)으로 홍군은 토벌 대상에서 합법적으로 국민당 정부군의 일원(제8로군)으로 편성됐다. 이처럼 천신만고 끝에 기사회생에 성공한 공산당의 리더 마오쩌둥은 이로부터 채 15년도 지나지 않아서 장제스를 물리치고 중원 대륙의 새로운 주인으로 들어섰다.

마오쩌둥이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문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역사적 영향

제2차 국공합작으로 공산당을 수용한 국민당 정부는 일본에 대한 전면적인 ‘결사항전’을 선언하고 중국 내륙의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겼다. 일본군의 공격에 지구전으로 맞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국부군이 일본군과 정면대결을 벌이는 동안 공산당의 홍군은 적의 후방 점령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확대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 결과 국공합작 시 수만 명에 불과하던 공산당 세력은 1945년 중일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면 120만 당원에, 병력은 200만에 이를 정도로 강력해졌다.

공산당 세력의 급성장은 당연히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경계심과 견제를 불러왔다. 하지만 이제 홍군은 지난날 초라한 행색으로 도망치기에 급급하던 군대가 아니었다. 일본이 항복한 직후 근본적으로 다른 목표를 지향한 두 진영은 내전(內戰)에 돌입했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이라는 20세기 중국을 대표하는 두 영걸 간에 이후 4년여에 걸친 최후의 중원 장악 결전이 벌어진 것이었다. 내전 초기의 예상과 달리 최종 승자는 공산당의 홍군이었다. 일본군에 맞서느라 전력을 소모한 데다가 부패와 실정(失政)으로 민심을 잃은 국민당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공산당의 위세에 더 버티지 못하고 대만 섬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는 마오쩌둥의 카랑카랑한 육성(肉聲)이 천안문 광장에 울려 퍼졌다. 거의 1세기에 걸친 신산(辛酸)의 혼란기를 거친 후 새로운 중국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장제스가 아들처럼 친애한 장쉐량이 나름의 우국충정으로 1936년 12월 중국 내륙 시안의 유서 깊은 화칭츠(華淸池)에서 일으킨 한 사건이 종국에는 중원 대륙의 주인을 바꾸는 결과를 초래했으니 역사란 필경 아이러니로 가득한 수수께끼가 아닌가?  사진=필자 제공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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