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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투쟁 골격 갖춘 ‘대한군정부’ 총사령관 활약

기사입력 2019. 05. 28   17:11 최종수정 2019. 05. 28   17:16

<20> 제3부, 북만주 황야에 서서 ④ 덕원리의 꿈

병력 없는 조직 군사문제 전담
대종교인-유림 연합 대한정의단
초기엔 지휘할 병력조차 없어

  
신학문 익힌 군사엘리트 유입
이상룡에게 군 참모진 지원 요청
이장녕·이범석 등 핵심요원 보강


유림-신학문 충돌, 결별, 탈퇴
공교회 출신 복벽주의자들 반발
결국 공화주의자들이 대세 이뤄

  
만주 최대 항일무장 단체로 거듭나
단체 성격 완전히 바꾸고 조직 개편
주위 지원받아 양병·용병 전권행사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의 총재부(서일 총재)가 있던 덕원리. 경신참변(1920) 이후 마을은 절멸되었다.  필자 제공

백포 서일. 대종교 3종사로 추앙받는 서일은 김좌진을 초빙하여 북로군정서를 만들 수 있도록 한 북로군정서 총재였다.


사람 사는 곳에서 둘 이상이 모이면 어디든 갈등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부부싸움이 그냥 나는 게 아니다. 둘이기 때문에 난다. 다 그랬던 건 아니지만 독립투쟁을 하자고 모인 동포사회의 지사들 간에도 갈등은 비일비재했다. 유림의 생각과 신학문을 한 사람의 생각이 달랐고,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끼리도 모이면 흩어졌다. 임정도 사실 1944년도에야 비로소 좌우를 망라한 통합을 이뤘다. 그 또한 갈등을 겨우 봉합한 상태에서.
앞서 언급했듯 중광단은 서일을 중심으로 현천묵, 백순, 박찬익, 계화, 김병덕, 채오 등이 핵심 인물이었다. 이 지도부 요원 거의가 대종교인이면서 교육자이다 보니 군대를 경영할 식견이 부족했고 무장시킬 수 있는 재원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25일 마침내 유림이 중심이 된 ‘공교회(孔敎會)’와 연합해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발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김좌진을 초빙해 군사문제를 총괄하게 했다. 초빙을 받았지만 김좌진으로서도 곤란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휘할 병력도 없었지만 엄밀히 말해 대한정의단 자체가 군사단체가 아니었다. 그래서 예하에 ‘대한군정회’라는 군사단체를 별도로 만들어 김좌진에게 군사문제를 전담케 했다. 따지고 보면 김좌진이 최초 부임한 직책은 ‘대한정의단 예하 대한군정회 책임자’였다. 이원화된 조직이자 예속관계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독립적인, 지극히 애매모호한 직위였던 것이다.

김좌진은 명실상부한 군사조직을 만들기 위해 이상룡에게 참모진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때 김좌진의 요청에 의해 온 인원들이 바로 일명 ‘북로군정서’로 불리는 ‘대한군정서’의 핵심 요원들이다. 길림군정서와 서로군정서 계통의 요원들 즉, 조성환, 이장녕, 이범석, 김훈 등이 그들이다. 신학문을 익힌 군사 엘리트 그룹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들은 신민회 계통의 공화주의자들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대한정의단의 한 축을 이루었던 공교회 쪽에서는 공화주의를 견지하는 이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선왕조의 복고를 지상과제로 삼는 ‘복벽주의자’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발이었다. 서로 결별했다. 김성극, 이규, 강수희 등이 탈퇴해 ‘대한광복단’ ‘대한정의군정사’로 각각 흩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정의단은 만주지역 최대, 최강의 항일무장단체로 거듭난다. 원래 대한정의단의 기존 지도자들도 ‘공화주의자’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복벽주의자’들이라고 볼 수도 없었다. 다만 같은 대종교인이면서 과거의 투쟁경력, 군사적 식견, 그리고 무엇보다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탁월한 방책을 가진 김좌진이 적격이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임정의 확고한 민주공화주의 표방이나 이상룡 등 대종교인들이지만 공화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서로군정서의 경향 등으로 이들도 결국 김좌진의 노선에 수긍하고 공화주의로 변신하게 됐다. 마침내 대한정의단이 민족주의적 공화주의 항일무장단체로 거듭난 것이다.

이상룡의 도움으로 참모진을 보강한 김좌진은 10월, 대한정의단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후에 상해 임정의 요청으로 대한군정서로 개칭함)’로 재발족한다. 대한군정부로 변화한 것은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단체의 성격을 합목적적으로 완전히 바꿨다는 점과 총재부와 군사부로 조직을 개편했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의미가 크다. 총재부가 총괄적 대표 기능을 갖기는 하지만 전투근무지원 분야를 담당하고 양병과 용병에 있어서는 김좌진이 총사령관이 되어 전권을 행사하게 됐다는 점이다. 비로소 김좌진이 ‘총사령관’이 된 것이다.

덕원리는 서대파에 자리 잡은 군사부와 걸어서 하루 거리였다. 이범석도 김훈도 모두 이곳에서 서일에게 큰절로 부임신고를 했다. 조성환도 이장녕도 그곳에서 서일을 만나 훗날을 다짐하고 독립을 꿈꾸었다. 조국광복의 꿈을 꾸는 총본산이었다. 그러나 김좌진의 혼자 힘으로 그 꿈을 실현할 수는 없었다. 김좌진의 능력, 인품, 처신도 훌륭했겠지만 주위의 지원이 지대했다. 좀 길지만 소개한다. 다음 서신을 꼭 읽어 보시기 바란다.

“밀십(密什)에서 맹서한 것도 변하지 않았고 화전(樺甸) 입구에서의 약속도 두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번 남북으로 흩어지니 소식이 묘연하더니 뜻밖에 두 젊은이가 편지를 가지고 찾아와 오래된 약속을 버리지 않으시는 의리에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삼가 봄이 한창인데 객지에서 기체가 나라를 위해 만중하신지요. 군정서의 일이 날로 발전하여 실력을 완전히 갖추셨으니, 저로 하여금 망양지탄(亡羊之歎)을 금할 수 없게 합니다. 더구나 좌우께서는 간성지재(干城之才)로 사령관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범위가 작지 않은 데다 널리 계책을 연합하여 결집함에 인력도 있고 실력도 있으시니 무슨 일인들 잘하여내지 못하시겠습니까? 다만 관할하는 지역이 매우 넓어 조석으로 서로 만나 긴밀한 협조를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저 계원(啓元)1은 이곳에 도착한 후로 마침내 여러 사람의 권유로 만에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직임을 맡아서 세월만 보내고 진전은 조금도 없는 중에 봄기운이 이미 생겨나고 있으니, 자칫 시기를 놓쳐 대사를 그르치게 된다면 한갓 여러분들에게 장애만 될 듯하여 매우 두려울 뿐입니다. 이장녕(李章寧) 군은 이곳에 있으면서 이미 띠고 있는 직명이 있는 데다가 긴요한 일로 심양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약 마음을 같이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요청하신 뜻을 받들지 못하겠지마는, 다만 귀서와 본서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기 때문에 기관으로 차별해서 달리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부득이 이미 맡은 직무를 낱낱이 되돌리고 지금 진행 중인 일을 철폐하여 말씀하신 대로 보내오니 좌우께서는 저의 충심을 생각하시어 진실한 마음으로 연대하시고 경계를 두지 말고 일치하여 함께 나아가기를 천만 간절히 바랍니다.”

이장녕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김좌진의 서신에 대한 이상룡의 답신이다. 둘은 서른한 살 차이다. 세대를 무색하게 하는 대인들의 면모가 진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북로군정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예비역 육군대령>


<각주>
1 이상룡의 본명은 이상희(李象羲)다. 서간도로 망명 후 이계원으로, 이어서 이상룡으로 개명했다. 계원은 첫 번째 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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