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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하극상 ‘시안 사변’… 소멸하던 공산당 ‘기사회생’

기사입력 2019. 05. 28   16:04 최종수정 2019. 05. 28   16:06

<69> 1936년 12월 장쉐량, 시안(西安)에 온 장제스를 감금하다(上)

지식인 중심 서구사상 주창 5·4운동
중국 정치사의 흐름 규정하는 방향타

 
1917년 10월 공산주의 새로운 사상 대두
1921년 7월 마오쩌둥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 창당…당원 50여 명 불과

 
국민당 쑨원 삼민주의로 조직망 확대
장제스,국민당의 난징 정부시대 열어  

대장정 중인 공산당 군대(홍군).                 필자 제공


장제스가 백범에게 보낸 사진.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제공



오늘날 미국과 무역전쟁이라는 명분으로 ‘패권경쟁’을 벌이는 중국은 근본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끈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명으로 수립한 일당 통치 국가다. 1921년 7월 상하이의 한 가옥에서 미약하게 출발한 공산당이 불과 30년 안에 중원의 주인이 됐다. 이때까지 공산당은 힘든 세월을 보냈다. 무엇보다도 경쟁세력이던 국민당 군대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1930년대 중반 ‘대장정’으로 알려진 고난의 피난길에 올랐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런데 역사의 여신이 도운 덕분일까? 1936년 12월 12일 사면초가의 공산당을 기사회생시키는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공산당군 토벌 독려차 고도(古都) 시안(西安)을 방문한 국민당 정부 수반 장제스(蔣介石·1887~1975)를 동북군 총수로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장쉐량(張學良·1901~2001)이 체포해 감금한 ‘시안 사변’이 터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청 멸망 후 왜 중국은 혼란에 빠졌을까? 왜 장쉐량은 친부처럼 따르던 장제스를 감금했을까? 이 사건이 이후 중국사 및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한 시도다.



역사적 배경

아편전쟁 후 청조(淸朝)가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추구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20세기 초반 모두 실패로 드러났다. 이에 실망한 사람들은 청에 대한 기대를 접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꿨다. 일찍이 흥중회라는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민족·민권·민생이라는 삼민주의(三民主義)를 표방한 쑨원(孫文)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들 혁명세력은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1911년 10월 신해혁명을 통해 거의 300년간 이어진 이민족 왕조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는 데 성공했다. 아편전쟁으로 점화된 내우외환 끝에 맺은 열매였다. 하지만 이는 ‘신(新)중국’ 건설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후 1949년 10월 중공 정권이 수립될 때까지 중국인은 예측불허의 혼란기를 감내해야만 했다.

혁명 성공 후 부상한 인물은 쑨원이 아니라 오히려 청조에서 출세를 거듭한 위안스카이(袁世凱)였다. 일찍부터 청의 신식 군대 육성을 책임지던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정세 판단에 뛰어났던 그는 청조를 버리고 혁명파와 손잡았으나 이는 권력 장악을 위한 잠정적 제스처에 불과했다. 중화민국 수립 직후부터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군권(軍權)을 동원해 경쟁세력 제거에 매진했다. 체포를 피해 혁명파 핵심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한 사이 독재권을 확립한 그는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했으나 1916년 6월 초 급사(急死)하고 말았다.

위안스카이의 죽음으로 중국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의 사후 휘하 장군들이 각자 후계자를 자임하며 중국 전역에서 발호했기 때문이다. 사적 무장력을 기반으로 민중을 수탈하면서 일정 지역을 지배한 일명 ‘군벌(軍閥)’들이 할거(割據)하는 시대(1916~1928)가 도래한 것이었다. 전국에서 난립한 군벌의 우두머리들은 휘하 병력 유지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세력권 내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했다. 더욱이 무장력 확보를 위해 외세에 각종 이권을 팔아넘기는 매국 행위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내부적으로는 군벌 착취에 시달리고 외부적으로는 군벌과 결탁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당하면서 중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움직임이 개명된 지식인 중심으로 일어났다. 일반적으로 ‘5·4운동’이라 불리는 새로운 조류가 1915~1920년대 초반까지 지식인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이 운동에 불을 붙인 것은 당시 베이징대학 교수인 천두슈(陳獨秀)가 창간(1915)한 『신청년』이란 잡지였다. 신지식인들은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구습의 근원으로 비판하면서 자유민주주의·개인주의 그리고 과학사상 등 서구사상의 적극적 수용을 주창했다. 5·4운동은 1920년대 이후 중국 정치사의 흐름을 규정하는 중요한 계기이자 방향타가 됐다.

1917년 10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성공으로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이 대두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서구 열강의 비협조에 실망한 중국 지식인들에게 공산주의 소련은 중국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더구나 소련의 호의적 태도와 접근은 중국 지식인들을 더욱 고무시켰다. 드디어 1921년 7월 초 상하이서 천두슈·리다자오(李大釗)·마오쩌둥 등을 중심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한 중국 공산당이 창당됐다. 당시 전국적으로 당원이 50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모습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혁명 성공 소식과 특히 5·4운동을 통해 중국 민중의 정치적 잠재력을 깨달은 국민당 지도자 쑨원 역시 소수 엘리트 중심의 국민당을 대중 기반의 정당으로 변모시키고자 했다. 절박한 상황의 쑨원에게 볼셰비키 혁명 수출을 노린 소련이 접근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연소(聯蘇)·용공(容共)·부조농공(扶助農工)’을 표방한 제1차 국공합작(1924~1927)이었다. 이로써 공산당원의 국민당 입당이 허용됐다. 국민당은 쑨원이 제시한 삼민주의를 당의 이념으로 정하고 전국적으로 조직망을 확대했다.

무엇보다도 당의 군사력 확보를 위해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24년 여름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이때 초대 학교장으로 취임한 인물이 바로 장제스였다. 이곳에서 장차 북벌과 항일투쟁을 이끌 군사전문가들이 양성됐다.

1925년 봄 지도자 쑨원의 급서(急逝)를 계기로 국민당은 군벌에 의해 사분오열돼 있던 중국을 재통일하는 북벌(北伐)을 단행했다. 쑨원 사후 표면화한 국민당 내 좌·우파 대립 상황을 이용해 군권을 장악한 장제스가 공산당 세력을 축출하고 1926년 6월 북벌군을 이끌고 나섰다. 약 2년에 걸친 북벌을 통해 장제스는 대외적으로는 북벌의 주역, 대내적으로는 국민당 내 일인자로 권력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1928년 7월 북벌 완료 후 장제스는 국민당의 난징(南京)정부 시대(1928~1949)를 열었다.

중앙정부가 수립됐다지만 중국인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했다. 장제스의 독주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 가장 집요한 도전자는 국민당에서 축출된 공산당 세력이었다. 1927년 국공합작 결렬 후 수차례 농촌 봉기에서 실패한 공산당은 남부 루이진(瑞金)에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강서 소비에트(Soviet)를 수립(1931년 11월)하고 세력 확대를 꾀했다. 이에 국민정부군(國府軍)이 소탕작전에 돌입했다. 국부군의 포위 공격이 강화되면서 공산당군(紅軍)은 더 버티지 못하고 1934년 10월 장시성(江西省) 근거지를 버리고 1년여 동안 총 1만2000㎞에 달하는 고된 행군 끝에 산시성(陝西省) 옌안에 도달하는 일명 ‘대장정(大長征)’을 결행했다.

1935년 가을 이래 공산당 세력은 옌안의 산악지대에서 국민당 토벌군에 포위된 채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신세가 됐다. 조금만 더 압박이 가해졌다면, 장제스의 소망대로 공산당 세력은 중원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의 여신 ‘클리오’가 조화를 부린 탓인지 이들을 기사회생케 하는 이른바 ‘시안 사변’이 터진 것이었다. 공산당 섬멸을 독려하려고 시안 사령부를 방문한 장제스가 동북군 수장으로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장쉐량에 의해 감금당하는 희대의 하극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이제 중국사의 도도한 강물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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