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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지휘관 절실했던 ‘대한정의단’으로 가다

기사입력 2019. 05. 21   15:44 최종수정 2019. 05. 28   15:30

<19> 제3부, 북만주 황야에 서서 ③ 길림에서 왕청으로

만주항일투쟁 대부 이상룡과의 만남
독립전쟁 선포·일전불사 필요성 피력
첫 군사단체 길림군정사 창설 이어져


신흥무관학교에 군사전략가 많았지만
무장 뒷받침할 대중적 기반 부족

 
많은 교인·교단 지원 ‘중광단’
서일이 중심이 된 대종교인 단체
한인 개척 북간도 왕청 덕원리서 활동

 
대한정의단으로 이름 바꾸고
항일무장투쟁 단체로 변화 꾀해

석주 이상룡. 서로군정서 독판과 임정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은 북만주 항일무장투쟁의 대부였다.


한동안 안동 ‘임청각’이 화제였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덕분이다. 임청각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대부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일제가 얼마나 집요하게 지사의 땅을 훼손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됐다. 이 집의 내력은 조선 중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로 증개축을 거쳐 마당만 다섯인 거택이 됐다. 일제는 이상룡의 생가를 파괴할 목적으로 이 거택 솟을대문을 헐어 신작로를 내고 안마당을 뚫고 기찻길을 냈다. 원래 영주에서 안동을 향하는 중앙선 철길은 임청각을 자르고 갈 길이 아니었다. 10㎞나 돌아 기어이 임청각을 요절낸 것이다.
부와 존경을 뒤로하고 식솔들을 이끌고 만주 땅으로 건너가 순국하는 날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준 대일항쟁의 거목, 석주 이상룡은 산 자의 역사로 함부로 포장할 수 없는 인물이다.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강습소를 세웠으며 그를 통해 항일투사 공급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임정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이 없었다면 만주 지역 한인들의 항일무장투쟁이라는 민족사의 자부심은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위인이다.

김좌진이 이상룡을 찾아갔다. 무오독립선언 직전이다. 이상룡은 김좌진이 아직 20대 후반이나 애국계몽운동과 교육운동을 하고 국내 최대의 의열투쟁조직인 대한광복회 부사령으로 활동하는 등 화려한 항일 경력을 지닌 인물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 독립운동계의 대선배이자 60세를 넘긴 자신 앞에서도 흐트러짐 하나 보이지 않는 김좌진을 보고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내겠구나 생각했다.

“제가 만주로 와서 여기저기서 활동하고 계시는 어른들을 찾아뵈었습니다. 아직 우리가 준비한 것만으로는 저 강한 일제를 물리칠 힘이 모자랄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이제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일전을 불사할 날이 온 것 같습니다.”

김좌진이 이상룡의 의중을 꿰듯이 의견을 피력했다. 이상룡이 만주땅 유하현으로 건너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김좌진의 말대로 언제까지나 준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 만남이 ‘길림군정사’의 창설로 이어진다. 실제 1919년 초까지 독립운동 진영에 체계적인 군사단체라고 할 만한 조직이 없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군사단체를 만들어 보자는 의도였다.  


현재의 왕청현 모습. 1919년 당시의 왕청 일대는 독립군 단체가 몰려있던 곳이었다.


신흥무관학교를 바탕으로 한 길림군정사에는 이상룡을 위시해 여준, 유동열, 박찬익, 조성환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대종교인들이었다. 신흥무관학교가 중심이 되다 보니 군사전략가도 많았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다름 아닌 무장을 뒷받침해 줄 대중적 기반이 부족했다. 1910년경 이회영 일가와 이상룡 일가 등 개인재력을 바탕으로 경학사가 성립된 이후 중국 당국의 배타적 견제 속에 겨우 기반을 닦았으나 거기까지였다. 경제적 안정에 곤란을 겪었던 것이다. 뒤에 서로군정서가 만들어지고 독판 이상룡, 연성대장 지청천이란 걸출한 지휘관이 지휘를 했지만 청산리대첩 등에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던 이유도 실전에 활용할 무장력 부족이 원인이었다.

반면, 북간도 왕청현 덕원리(汪淸縣 德源里)에는 대종교 교단 차원에서 추진하던 항일무장단체가 변모를 꾀하고 있었다. 길림군정사와는 다르게 많은 교인들과 교단의 지원이 있었지만 군사적 식견을 겸비한 리더의 부재로 답보 상태에 놓인 단체였다. ‘중광단(重光團)’이다. ‘중광’이란 어둠에 잠겨 있던 대종교를 다시 밝히면서, 예전 광명세계로 이끈 한배검 즉 단군의 교단이 다시 이어졌다는 대종교적 의미를 지닌 말이다.

중광단은 1911년에 ‘백포 서일(白圃 徐一)’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원래 창립 목표는 항일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학교를 세우고 동포사회를 건설했다. 말 그대로 계몽운동으로 8년이 지났다. 그즈음 북간도에도 무장투쟁의 열기가 들끓었다. 서일도 본래의 목적에 맞게 중광단의 변모를 꾀하고자 했다. 주위의 무장단체와 연합도 하고 단체의 명칭도 바꿨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대한정의단’이다.

왕청은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천교령·노송령을 경계로 흑룡강성과 맞대어 있는 다소 외진 곳에 있다. 1920년경의 왕청 역시 궁벽한 곳이었다. 그러나 거의 전체가 우리 한인이 개척한 피와 땀이 스민 땅이자 독립군의 숨결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투사의 땅이기도 하다. 산과 계곡, 그리고 그 계곡을 비집고 길게 누운 뜬금없는 평지. 그래서 찾기는 힘들지만 찾아들면 그 또한 지낼 만은 한 곳이다. 국경도 가까웠다. 두만강을 건너 곧장 북으로 향하면 마주치는 곳이 왕청이었다. 번성하라는 의미에서 왕청이 아니고 만주어로 ‘보루(堡壘)’를 뜻하는 ‘왕친’의 음역 표기일 뿐이다. 실제로 지형을 보면 보루의 역할을 하기에는 좋은 곳이다. 왕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협곡과 고갯길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왕청은 북로군정서가 탄생했고, 이동휘가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이범윤도 거쳐 간 독립운동의 성지가 됐다.

그중 덕원리는 왕청의 차원을 넘어 우리 민족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적 수도 역할을 한 곳이자 북만주 항일무장투쟁의 거두 서일의 꿈이 담긴 민족의 땅이었다. 덕원리는 이미 1890년대에 이주한 조선인(대한제국 수립 전이었으므로)들이 개척한 곳이다. 남쪽으로는 야산을 등지고 북쪽으로는 크지는 않지만 제법 하천 노릇을 하고도 남을 ‘유수하(柳樹河)’가 청아하게 흐르고 있어 마을 하나가 들어앉기에는 더없이 아늑한 지역이다. 천교령 자락의 산맥이 유수하의 북벽이 되어 찬바람을 막아주니 유수하 양편으로는 1910년에 서일 등 대종교 신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옹기종기 실한 마을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았다. 마을은 선이주민까지 대종교인으로 바뀌었다. 대종교 동도본사 제2사와 ‘명동학교(용정의 명동학교와 동명)’도 세워졌다. 그 연장선상에서 발족된 것이 ‘중광단’이었던 것이다. 서일은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바꾸며 이 단체를 명실상부하게 지휘해 줄 지휘관을 초빙한다. 그가 바로 김좌진이었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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