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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 병영칼럼] 지하의 파라다이스 ‘을지로 아크앤북’

입력 2019. 05. 15   15:39
업데이트 2019. 05. 1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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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 미술평론가
황인 미술평론가


도쿄의 긴자 6정목, 젊은이들이 환호하는 빌딩이 새로 생겼다. 빌딩의 이름은 긴자식스다. 설계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증축 및 재건축 설계를 한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가 맡았다. 고급 브랜드를 취급하는 매장들을 지나 6층에 오르면 쓰타야라는 책방이 나타난다. 대부분이 디자인·아트 서적이다. 책을 고르고 사기보다는 힐링하거나 바로 옆 스타벅스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책은 읽는 것이다’라는 기존의 개념을 뒤집어 오브제로서의 책을 즐긴다는 기분이 들게 하는 위락공간이 쓰타야다.

쓰타야 못지않게 재미난 책방이 을지로1가에 생겼다. 지난해 연말 을지로 부영빌딩 지하에 생긴 아크앤북은 책과 생활을 다양한 방식으로 묶은 새로운 형태의 신세대 서점이다. 오프라인 책방이 점점 사라져 가지만, 도심 속의 랜드마크로서 책방의 역할은 여전하다. 예전에는 책방이 젊은이들의 주된 약속장소였다. 서울의 책방은 종로에 몰려 있었다. 종로서적이 그 중심이었다. 책을 읽으며 친구를 기다린다. 친구를 만나 근처의 고려당 빵집에 가서 도넛을 먹는 재미가 있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시끄러운 음악다방에서는 요란한 옷차림의 디제이가 음악 소리를 살짝 낮추고 전화가 걸려온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여러 개의 수신용 전화부스 중에서 호명된 번호의 전화부스로 가서 전화를 받으면 됐다. 책방이나 다방에서 오랫동안 사람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으면 메모판에다 포스트잇으로 이동처나 간단한 인사말을 남겼다.

책방과 다방이 결합하고 여기에 라이프스타일이 더해진 공간이 을지로1가의 아크앤북이다. 을지로1가의 북쪽에는 예전에 미국문화원이 있었다. 문화원의 도서관을 대학생들이 많이 찾았지만, 문화원이 없어진 이후로 젊은이들의 발길이 뜸했다. 삼성빌딩 지하에 국내 최초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인 라칸티나의 고풍스러운 간판이 외롭게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을지로입구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을지로3길로 이어지는 골목은 근처의 직장인들을 상대로 한 술집과 식당이 많다. 아저씨들이 분위기를 주도하는 왁자지껄한 명정(酩酊)의 골목이다.

새로 생긴 을지로입구역 1-1번 출구로 나와 아크앤북으로 들어서면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극도로 ‘힙한’ 느낌이다. 독일의 예술서적 전문출판사인 타센의 도서 8000권으로 천장을 덮은 입구는 압도적이다. 통상적인 서적의 분류법과 달리 일상·주말·스타일·영감 등 4개 주제로 책을 분류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세계 유수의 잡지는 물론 문화의 첨단을 이끌어가는 진보적인 잡지들도 모아놓았다.

독서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책을 읽기에 좋다. 서가의 책을 들고 식당에 들어가도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다. 초밥집, 태국 레스토랑, 프렌치 레스토랑, 피자집, 중식당, 카페, 빵집 등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미식가의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책의 디자인, 책 속의 콘텐츠와 몸의 오감이 일체가 되어 황홀한 상승감으로 부풀어 오른다. 온종일 있어도 쾌적할 뿐인 세련된 공간이 드디어 서울의 도심 지하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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