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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쟁한 지사들과 나란히, 민족대표 이름 올려

기사입력 2019. 05. 14   16:02 최종수정 2019. 05. 14   16:57

<18> 제3부, 북만주 황야에 서서 ② 무오대한독립선언서

최초 독립선언서
김좌진 등 애국지사 39인
만주서 무오대한독립선언서 발표
2·8독립선언·3·1운동 기폭제 역할

 
항일무장투쟁을 외치다
영토 지키기 위해 무력사용 표방
결사항쟁으로 독립 되찾자 호소

 
‘조선’ 대신 ‘대한’을 사용하다
대표 39인 대부분 공화주의자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깊숙이 관여
국명과 국가 이념 정립에 영향

 
만주로 간 지 1년여 만에 민족대표로
김좌진, 촉망받는 젊은이에서
탄탄한 뿌리 지닌 지도자로 우뚝  

1919년 2월 1일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다.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되는 ‘기미독립선언서’를 외워야 했다. 이 선언서의 문장과 한자 뜻풀이를 외우느라 청춘의 많은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그것도 역사 과목이 아니라 국어 과목에서 말이다.
필자가 있는 한중우의공원을 찾아오는 많은 학생 중 그 내용을 다 아는 학생이 없는 것을 보면 지금은 말 그대로 ‘달달’ 외우게 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기미년(己未年)’은 각별하다. 특히 100주년을 맞는 기미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이 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정월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한 고종이 승하했고, 3월 1일에는 전 민족이 독립의 함성으로 삼천리 하늘을 뒤덮고 연해주와 만주 일대를 들썩였다. 그래서 ‘기미만세운동’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 기미년에는 서울에서만 선언서가 작성된 것이 아니었다. 멀리 만주 땅 길림에서 애국지사 39인의 연명으로 ‘무오독립선언서’로 알려진 ‘대한독립선언서’가 가장 먼저 발표됐다. 그리고 동경에서도 2월 8일에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만주에서 발표된 선언서는 기미년에 앞서 ‘무오년(戊午年)’에 작성됐다고 알려져 있다. 선언서에 단기 4252년 2월로 기록돼 있으며 음력으로는 무오년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현존하는 최초의 대표성을 지닌 독립선언서다. 그럼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의 강제 병탄으로 국치를 당한 지 9년째, 세상은 예전의 대한제국 말기가 아니었다. 중국의 동북지방에는 많은 항일무장단체가 수립돼 가고 있었고, 국내의 역량도 신지식으로 무장한 지사들이 사회와 교육계에서 중심이 돼 있던 시기였다. 먼 나라 이야기지만 1917년에는 천하제일 대륙국 러시아가 혁명으로 정권이 바뀌었고, 유럽에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의 지도가 요동쳤다. 중국은 아직 확실한 주인이 없었지만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정을 표방한 지 한참을 지난 때였다. 그 시기에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선전포고요, 전 동포들에게 각성해 대일성전에 나서라고 촉구하는 역할로 ‘선언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시발지가 만주땅의 중심부였던 길림이었다.



상해 마당로 임정청사 2층 집무실 모습. 1919년은 임정이 수립된 해다.



김좌진이 이 대한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9인의 명단에 포함돼 있다. 지면 관계로 내용까지 다 실을 순 없으나 대표 39인의 명단은 게재한다.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좌진(金佐鎭), 김학만(金學萬), 정재관(鄭在寬), 조용은(趙鏞殷, 본명 조소앙), 여준(呂準), 유동열(柳東悅), 이광(李光), 이대위(李大爲),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봉우(李鳳雨), 이상룡(李相龍), 이세영(李世永),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이종탁(李鍾倬), 이탁(李, 본명 이용화, 독립운동가 李鐸 선생과는 동명이인), 문창범(文昌範), 박성태(朴性泰),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翼), 손일민(孫逸民), 신정(申檉, 본명 신규식),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임방(任邦), 윤세복(尹世復), 조욱(趙煜, 조성환), 최병학(崔炳學), 한흥(韓興), 허혁(許爀, 본명 허겸, 허위의 형), 황상규(黃尙奎)’ 이상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 가운데 몇 분이나 함자를 들어 봤고, 알고 계시는가?

39인 중 가명으로 신원이 불확실한 ‘임방’과 훗날 변절자로 이름을 올린 ‘이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소한 위인전 한 권은 너끈히 채우고도 남을 인물들이다. 멀리 연해주의 사회주의자 이동휘로부터 미국에 있던 박용만, 이승만에 이르기까지 모두 강호에 이미 명성을 띄운 민족대표로 손색이 없다. 여러 설이 있으나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대종교 계통에서 주동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용 중 나오는 ‘단군대황조’라는 표현과 ‘단기 4252년’처럼 단기력을 선언 연도로 사용한 것, 참여 인원의 상당수가 대종교인들인 것 등이 그런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대종교인들만의 선언서는 결코 아니다. 선언서를 작성한 조소앙부터가 대종교에 입교한 적이 없다. 아울러 앞에서도 밝혔듯 39인 중에는 대종교와 무관한 인사도 다수다. 다만 당시 만주지역이나 동포사회에는 민족주의적 성향과 항일투쟁을 표방한 대종교의 교세가 가장 왕성했고 보편적이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 선언서는 오히려 ‘항일무장투쟁’에 방점을 둔 선언서였다.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 민족 전체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민주자립을 선포하노라(중략)”로 시작되는 선언서는 일제의 한반도 병탄에 대해 “일본이 사기와 강박은 물론 무력을 사용한 강제 병합을 했으므로 원천적인 무효”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며 “우리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무력 사용을 불사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동포들에게는 “이천만 동포들은 국민 된 본령이 독립이므로 ‘육탄혈전’을 감수하고 ‘결사적으로 항쟁’하여 독립을 되찾자”고 요구하고 있다.

3·1운동 시 발표됐던 태화관 독립선언서의 제목은 알다시피 그냥 ‘선언서’다. 한편 이 무오독립선언서의 제목은 ‘대한독립선언서’다. ‘대한’이란 국가와 민족의 주체와 ‘독립’이라는 목적을 명백하게 밝혀 놓고 있다. 그리고 3·1독립선언서와는 달리 ‘조선’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한’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훗날 태어날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독립선언에 참여한 지사들의 뜻이 ‘조선’에 있지 않음은 확실하다. 또한 연명인 대부분이 공화주의자였고 상해임정 수립에도 깊숙이 관여한 사실로 보아도 아울러 장차 수립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명과 ‘민주공화’라는 이념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 또한 확실해 보인다. 이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후 조소앙은 동경으로 건너가 이광수를 비롯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일본에서도 선언서가 발표되는데 그것이 ‘2·8 동경유학생 선언’이다. 여기에 자극받아 최남선이 펜을 들었고 손병희, 함태영, 한용운 등 민족대표들의 검토와 수정을 거친 것이 ‘기미독립선언문’이다. 이로 봐서도 ‘무오년 대한독립선언서’야말로 최초의 독립선언서로서 손색이 없다.

아울러 이 선언서는 대한광복회 부사령의 신분으로 도만을 했지만 1년여의 짧은 기간에 쟁쟁한 지사들과 나란히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린 김좌진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 이제 김좌진은 ‘촉망’의 차원에서 벗어나 탄탄한 뿌리를 지닌 지도자로 탈태한 것이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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