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획 > 군사 > 역사속 그때 그는 왜?

19세기 들어 러시아 ‘차르’ 전제정치에 개혁의 바람

기사입력 2019. 05. 14   15:04 최종수정 2019. 05. 14   15:07

<67> 1917년 3월 말 독일군 수뇌부는 왜 레닌에게 밀봉 열차를 제공했을까?(上)

노예와 다름없는 ‘농노’ 기반 귀족층 권력 유지…자유 쟁취 시도 이어져
러일전쟁 패전 뒤 ‘피의 일요일 사건’ 계기로 혁명 일어났지만 결국 실패
1차 세계대전이 또 혁명의 불씨…페트로그라드 식량 폭동 뒤 왕조 몰락 

 

제정 러시아에 미약하나마 자유의 씨앗을 뿌린 일명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을 묘사한 그림.

중년의 레닌.

19세기 제정 러시아에서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농노’가 된 러시아 농민의 참상을 묘사한 풍자화.

레닌이 열차로 러시아에 도착한 후 갈아탄 장갑차.

1917년 4월 3일 늦은 밤, 혼돈의 도시 페트로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차역에 그동안 필명으로만 알려진 볼셰비키 혁명가 레닌(Vladimir Ilyich Lenin·1870~1924)과 그 일행이 열차에서 내렸다. 기다리던 군중은 함성으로 일행을 맞았다. 역사(驛舍)를 빠져나온 레닌은 대기하던 장갑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본부로 향했다. 

 
혁명의 도시에 여장을 풀기가 무섭게 레닌은 당시 러시아인의 소망을 반영한 ‘빵, 평화, 토지 그리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뛰어들었다. 구호는 간명했으나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빵은 굶주림에 시달리던 노동자 계층에, 평화는 즉각적인 종전을 바란 병사들에게, 토지는 내 땅의 열망에 들뜬 농민들에게 어필하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여곡절 끝에 레닌은 그해 10월 말 볼셰비키 무장대가 주도한 봉기가 성공하면서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그동안 이념과 구호에만 머물던 공산주의 국가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대하드라마의 서막을 장식한 것이 바로 밀봉 열차를 이용한 레닌의 귀국이었다. 그렇다면 독일군 수뇌부는 왜 스위스에 머물던 레닌에게 밀봉 열차를 제공했을까? 귀국한 레닌은 어떻게 권력을 장악했을까? 이른바 볼셰비키 10월혁명의 성공은 세계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이 글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는 한 시도다.


역사적 배경


레닌은 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가라는 신분으로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 도대체 그가 태어난 시대에 러시아가 어떤 상태였기에 지방 장학관의 아들로 유복하게 생활하던 청년 레닌이 혁명가로 변신해 스위스까지 흘러간 것일까?

19세기로 접어든 제정 러시아는 과거로부터 다음과 같은 유산(遺産)을 물려받았다. 우선, 차리즘(Tsarism)이라 불린 강력한 전제정치였다. 중세 봉건제 이래 전통적으로 국가 통치의 한 축을 이뤄온 서유럽 귀족들과 달리 러시아 귀족들은 전제정치 강화 목적으로 차르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됐다. 이반 4세가 자신에게 충성하는 무인층을 주축으로 귀족계급을 재편성한 후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는 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봉사 의무를 부과한 동시에 면세, 면역, 영지 보유 및 농노에 대한 통제권 등 특권을 부여했다. 이처럼 러시아 귀족층은 군주에게 절대 충성하는 권력의 시녀에 불과했기에 차르는 성속(聖俗)을 아우르는 절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지배체제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바로 러시아 인구의 대다수인 농노들의 희생 덕분이었다. 원래 농노제도는 중세 유럽에서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데 비해 러시아에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1649년 세습 농노제가 선포되면서 러시아 농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소속 영지에 억류된 ‘농노’가 되고 말았다. 국가의 주 담세(擔稅) 계층이던 이들은 영주인 귀족에게 수시로 노동력을 제공하며, 심지어 노예처럼 매매되기도 했다. 이러한 러시아 농민의 비참한 실상은 19세기 들어서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유산을 안고서 출발한 러시아의 19세기는 개혁과 반동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19세기 초반부는 나폴레옹 군대의 침략과 격퇴로 시작됐다. 1815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열린 강화회담에서 차르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무찌른 주역임을 유럽 열강 대표들에게 과시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을 추격해 파리까지 가서 머무르는 중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은 일단의 러시아 귀족 출신 장교들을 중심으로 1825년 12월 차리즘에 대한 도전이 시도됐다. 일명 ‘데카브리스트(12월당)의 반란’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동토의 땅 러시아에 미약하나마 자유의 씨앗을 뿌렸다. 비록 실패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씨앗은 발아해 차츰 땅 위로 솟아나기 시작했다.

크림전쟁(1853~1856)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낙후된 러시아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나면서 개혁은 불가피해졌다. 국가 대수술의 책임을 떠맡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는 1861년 농노해방령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농민들에게 귀족의 인신 예속에서 벗어날 법적 자유와 함께 일정량의 토지가 분배됐다. 모처럼 찾아든 개혁의 햇살은 애석하게도 1881년 차르가 암살당하면서 단명하고 말았다. 러시아는 재차 강압적 통제와 탄압이라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부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알렉산드르 3세(재위 1881~1894)는 즉위 초반부터 강력한 통제를 천명하고 선대의 개혁을 무산시키는 반동(反動) 정치로 나아갔다.

그러나 ‘자유’란 일단 땅에 떨어지면 어떤 시련에서도 살아남아 변혁을 일으키는 속성을 지닌바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차르 정부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러시아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줄기차게 이어졌다. 혁명세력들의 활동에도 끄떡없던 차리즘에 대한 충격은 예기치 않게 외부로부터 찾아왔다. 러일전쟁의 패배 여파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1월)을 계기로 1905년 혁명이 발발한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이래 차르 정부의 반동 정치와 급속한 산업화 등의 여파로 누적된 제반 모순과 전쟁에서의 연패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러시아인의 불만이 분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단기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실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10월 선언’으로 대변되는 차르 정부의 전략적 대응은 효과를 발휘한 데 비해 혁명세력은 지리멸렬했기 때문이다. 혁명의 열기는 급격하게 식어갔고, 무엇보다 군대가 여전히 차르에게 충성했다.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가 권한 강화에 나서면서 누구도 러시아에서 혁명적 사태가 반복되리라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클리오(역사의 여신)의 마음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인지 1917년 초반 재차 혁명의 기운이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감돌았다. 1914년 6월 말 사라예보 사건으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계기를 제공했다. 맨 먼저 총동원령을 발동하면서 전쟁에 뛰어든 차르의 군대가 초반부터 참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러시아는 인적·물적 고갈 상태에 처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7년 2월 말 페트로그라드에서 식량 폭동이 발생했고, 이번에는 진압 명령을 받은 군대조차 총부리를 차르 정부로 돌렸다. 혁명의 물결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사태 수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니콜라이 2세가 3월 초 퇴위함으로써 300여 년간 지속한 로마노프 왕조가 몰락했다.

이어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나 중산층 중심의 의회와 노동계급 기반의 소비에트가 권력을 공유하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정부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러시아 민중의 개혁 요구를 실행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전쟁 지속 의지를 표명하고 노동자·농민의 개혁 요구는 애써 외면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러시아인의 기대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런 와중에 한 유명 볼셰비키 혁명가와 추종 세력이 1917년 4월 초 수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들은 바로 독일군 수뇌부가 제공한 밀봉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잠입한 레닌과 핵심 볼셰비키들이었다. 앞으로 이들이 러시아의 운명을 어떤 방향으로 몰고 갈 것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자료=필자 제공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에 대한 의견 개 있습니다. 로그인 후에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