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종교와삶

[우석제 종교와삶] 세상에 헛수고란 없다

입력 2019. 05. 14   13:54
업데이트 2019. 05. 1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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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제 육군32사단 신앙선도장교·대위·신부
우석제 육군32사단 신앙선도장교·대위·신부

내가 신학생이었던 10년 전의 일이다. 나를 양성하시던 주임신부님께서는 여름방학을 맞아 앞으로 사제가 되는 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며 제주도 올레길을 3주 동안 걷는 숙제를 주셨다. 신부님의 숙제가 아주 내키지는 않았지만, 제주도 올레길이 아름답다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에 좋은 체험일 것이라 여기며 나는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올레길을 걷던 어느 날 제주도에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걷기 시작한 지 5분 만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게다가 시작점부터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그래서 1시간을 되돌아와 원점부터 다시 출발하게 됐다. 순간 짜증이 나고 허탈감이 들었다.

때마침 주임신부님에게서 안부 전화가 왔다. 나는 “신부님 오늘은 제가 길을 잘못 들어서 한 시간이나 헛수고를 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석제야, 세상에 헛수고란 없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지 않아 보이는 것마저도 좋게 사용하신단다”라고 하셨다. 통화를 마치고 나는 “이 더위를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지!”라고 투덜대며 길을 걸었다.

그리고 2시간을 더 걸었을 때쯤, 나는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며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탈수 증세가 온 것이다. 물은 이미 예전에 동났고, 길 주변엔 온통 밭뿐이라 햇볕을 피할 그늘도, 민가도, 사람도 없었다. 순간 이러다가 여기에서 주저앉은 채로 있으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온 힘을 끌어내 다시 일어서서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10분을 터덜터덜 걸었더니 귤 농장의 컨테이너가 보였다. 그 안에서 TV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컨테이너로 다가가 “계십니까? 저 물 한 잔만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노부부가 나오셔서 “이 더운 날 청년이 웬일이야? 어서 와. 물도 마시고, 수박도 먹어!”라고 하시며 융숭한 대접을 해주셨다. 세상 최고로 맛있는 물과 수박이었다.

그런데 어르신께서 “아니, 올레길을 걷는다면서 왜 여기로 왔나? 여기는 올레길이 아닌데. 길을 잘못 들었나 보구먼”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다시 온 길로 돌아가 보니 어르신 말이 맞았다. 나는 또 길을 잘못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제대로 된 길을 찾아 걸었다. 그런데 걸을수록 점점 소름이 돋았다. 한 시간을 더 걸어도 상점도, 민가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길을 잘못 들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열사병에 걸려 길에서 객사했을 수도 있었다.

순간 주임신부님의 “세상에 헛수고란 없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내가 보기에는 되돌아와야 하는 헛된 길이었는데, 오히려 그 헛된 길이 나를 살렸고, 물과 수박까지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올레길에서 모든 것을 선용하시는 하느님을 만났다.

이렇듯 지금 내가 겪는 것들이 헛되게 보일 때, 그 헛됨이 전부일 것이라 단정 짓지 말고 기다려보는 것은 어떨까? 나를 살린 헛된 길처럼 분명 그 헛됨은 끝까지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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