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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 핵심으로 거듭나다

기사입력 2019. 05. 07   15:52 최종수정 2019. 05. 07   16:16

<17> 제3부, 북만주 황야에 서서 ① 인연, 그리고 홀로서기

신흥무관학교에 잠시 의탁
당시 교장 이세영 영향으로
민족주의적 대종교인으로 거듭나
여러 인물들과 군사지식·식견 교류
인적 네트워크 국내서 만주로 확장


독립 의지 살아있는 땅, 만주
무장투쟁 신념 가진 선배들 많아
독립전쟁 전진기지 확신 갖게 돼  

1940년대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삼원포의 모습. 이미 흔적마저 사라져버렸다.

고광 이세영. 그는 구한말 대한제국군 헌병대장을 지냈으며 신흥학교 교장으로서 김좌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김좌진은 만주에 들어선 이후 국내로 다시 복귀하지 못했다. 박상진의 뒤를 이어 대한광복회를 재건하기 위한 활동을 시도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워낙 철저히 조직이 와해돼 버리기도 했거니와 만주에서 지속적으로 투쟁할 수 있다는 비전을 봤기 때문으로도 보인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도만(渡滿)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홀로서기에 나서며 비로소 항일무장투쟁의 핵심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1917년 여름, 약산 김원봉은 천진 덕화학당을 다니고 있었다. 의열단 의백, 의용단단장, 중경 임정의 군무부장과 광복군 1지대장으로 지청천·이범석·김학규 등과 광복군을 지휘했으나 광복 후 월북함으로써 한동안 잊혀졌던 인물이다. 북한 초대 검열상과 인민위 상임부위원장을 지내다 1958년 숙청돼 사망한 ‘밀양 사람 김원봉’이 그다. 열아홉, 아직은 학동 티를 벗어나지 못했던 김원봉이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길에 아홉 살 위의 선배 김좌진을 찾아온다. 당시 김좌진은 위조지폐 제조를 위해 단동에 머무르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손일민과 함께 만난 것으로 봤을 때 대한광복회 만주지부와 국내에서 핵심사업을 추진하던 김좌진을 만나 선배에게 자신의 진로를 상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손일민은 대한광복회가 성립될 때부터 우재룡·권영목 등 6인이 만주에서 함께 결성한 ‘길림광복회’ 회원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김좌진을 찾는데 1919년 3월의 일이다. 이 시기는 김좌진이 ‘길림군정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로 이 만남이 있은 후 김원봉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폭탄제조법 등을 배우고 의열활동에 나서게 된다. 다만, 의열단 창설에 대한 조언을 구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후 이들의 만남은 더 이상 기록에 없다. 김원봉은 ‘의열단’을 결성하고 테러 중심의 활동을 추진했고, 김좌진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정규군을 양성해 무장투쟁의 길로 나섰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김좌진의 주 활동 무대는 북만주였고 김원봉의 주 활동 무대는 난징 등 중국 관내였기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큰 인연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만주로 들어온 뒤 국내와 선이 끊어진 김좌진이 의탁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곳은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였다. ‘이세영’이 교장으로 있었다. 이세영은 육영공원 출신으로 김좌진의 고향 홍주에서 김복한을 추대해 의기한 홍주의진 출신이기도 했다. 1897년 군에 투신해 정위계급으로 헌병대장(서리)까지 지냈으나 ‘1차 한일협약’으로 낙향, 다시 을사의병에 나선 강골이다. 청양 출신이지만 을미·을사 의병 당시 모두 홍주에서 봉기한 바 있다. 1913년에는 ‘독립의군부 3도사령’으로 활약했고 그해 6월에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복벽주의’를 견지하긴 했지만 공화주의자인 이회영·이상룡 등이 세운 신흥강습소에 합류, 소장을 지냈고 신흥강습소가 중학교로 개명했을 때 교장으로 재직했다. 김좌진이 이세영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던 바였고, 신흥중학교를 찾아간 것은 당시 항일투쟁의 대표적 인재 양성 기관이 신흥학교였다는 점에서 당연한 일로 보인다. 이곳에서 ‘대종교(大倧敎)’ 상교의 위치에 있던 이세영의 영향으로 김좌진은 대종교인이 됐다. 학교의 실질적 운영자였던 이상용도 대종교인이다. 당시 대종교인이 됐다는 것은 종교적 신앙심의 차원이 아니라 민족주의 사상으로 무장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김좌진이 이세영의 식객으로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의 군사지식과 계몽운동으로 단련된 식견을 여러 인물들과 교류하며 전하고 조언도 했으리라 보인다. 그랬기 때문에 이상룡 등 쟁쟁한 선배들에게 깍듯한 예를 받았으며, 만주지역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대우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신흥학교에서의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김좌진은 홀로서기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이 기초는 여러 측면에서 김좌진의 북만주 활동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먼저, 지금까지 국내에 머물렀던 안목의 확장이다. 이세영이 있는 신흥학교에서 만주지역의 항일무장투쟁과 한인들의 실정 등을 고려한 독립투쟁 방략을 구상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좌진의 눈에 들어온 만주 땅에는 무장투쟁의 신념을 가진 선배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이 이미 40~50년에 걸쳐 우리 민족이 삶의 터전을 일군 또 하나의 영토와 같은 곳이며, 독립을 위한 희생을 기꺼이 감내할 수 있는 동포들과 그 동포들의 의지가 살아 있는 곳임을 비로소 안 것이다. 그 때문에 만주지역이 독립전쟁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전진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라는 ‘확신’이 그것이었다. 물론, 대한광복회의 주된 임무가 북만주에 무관학교를 만들어 국내로 진공하는 것이었지만 그 실현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김좌진이 순국하는 그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향조국진군(向祖國進軍)’을 신념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핵심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대종교인으로의 거듭남 또한 중요한 사실이다. 대종교는 이후 김좌진의 삶에 내·외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그의 야전사령관 이력도 대종교 단체에서 시작됐고, 그의 핵심 참모들도 대부분 대종교인들이었다. 이로써 그는 신민회가 지향했던 공화주의와 접목한 ‘민족주의적 공화주의자’라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적 네트워크의 확장이야말로 김좌진에게는 큰 자산이 됐다. 만주지역 항일투쟁의 중심 역할을 하던 신흥학교는 강호의 쟁쟁한 투사들의 결집 장소였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자산은 김좌진이 대한정의단(중광단의 후신) 총사령관으로 초빙돼 부대를 확장하고 정예화할 때 그 참모나 예하 지휘관으로 기꺼이 자신의 제자나 부하들을 김좌진에게 보내준 이상룡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의 지원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는 바꿔 말하면 김좌진의 능력을 그 선배들이 알아봤다는 말도 된다. 대한광복단 부사령 신분으로 만주로 왔고 입만 당시부터 신문이 들썩일 정도로 유명세를 치렀지만 김좌진의 진짜 능력이 검증됐기에 ‘무오독립선언’에 민족대표 39인 중 일인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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