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곳곳에 그려진 벽화…북아일랜드 아픈 역사를 말하다

입력 2019. 05. 07   16:00
업데이트 2019. 05. 0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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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일랜드(下)


  신·구교도 분리지역
다양한 벽화·희생자 추모비 설치

 
타이타닉 기념관
첨단기술 활용해 사고 상황 재현

 
시청역사관
수백 년 전통 지역연대 마크 전시

벨파스트 신·구교 분리지역 근처 거리의 바비 샌즈 벽화. 북아일랜드 사태에 관심 있는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장소다.
벨파스트 신·구교 분리지역 근처 거리의 바비 샌즈 벽화. 북아일랜드 사태에 관심 있는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장소다.


지난 4월 18일, 북아일랜드 제2의 도시 데리에서 분리독립주의자들과 영국 경찰 간에 충돌이 있었다. 이 와중에 일부 시위대가 쏜 총에 여기자 매키(29)가 사망했다. 이 갈등이 시작된 시기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잉글랜드왕 헨리 8세가 이 지역에 신교도들을 대거 이주시키면서 가톨릭계 구교도들과 다툼이 본격화됐다. 1949년 아일랜드의 완전 독립 시, 전체 32개 주 중에서 신교도가 많은 북아일랜드 6개 주가 영국을 택했다. 그 후 30여 년간 신·구교도 충돌로 3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8년 북아일랜드는 ‘성 금요일 협정’으로 안정을 되찾았고, 2005년에는 IRA(구교도 무장단체)도 해체를 선언했다. 그러나 2012년 신IRA 조직이 나타나면서 폭탄테러 시도, 주요 시설 폭파 위협 등으로 최근 영국 전역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신세대 축제의 장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더블린에서 북아일랜드 벨파스트까지는 널찍한 고속도로가 남북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다. 어디서부터 영국령인지 식별이 불가하다. 별도의 세관도 없고 여권 검사도 없다. 단지 아일랜드는 ‘유로화’, 북아일랜드는 ‘파운드화’를 사용한다는 것만 다를 뿐이다.

벨파스트 시내에 들어서니 도시 전체가 시끌벅적한 분위기다. 매년 8월 초에 개최되는 ‘성 소수자 축제’ 기간이란다. 거리 구석구석에는 요란한 음악과 함께 춤판이 벌어졌고, 주변은 쓰레기가 뒤범벅이다. 윗옷을 벗어 던진 청년들이 팻말을 들고 시민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관심을 유도한다. ‘테러 위협’ ‘무장경찰’ 등의 상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오히려 경찰은 취객 난동에 더 신경을 쓴다. 여행사에서는 신·구교도 분쟁 지역의 개인적 출입은 가급적 자제를 권유한다. 그러나 도시 분위기로 봐서 자신들을 찾아온 여행객들에게 애꿎게 테러를 가할 영국인은 없을 것 같았다.

벨파스트 신·구교 분리지역 부근의 분쟁 희생자 추모공원 전경. 전시된 사진에는 상당수의 어린이도 포함돼 있다.
벨파스트 신·구교 분리지역 부근의 분쟁 희생자 추모공원 전경. 전시된 사진에는 상당수의 어린이도 포함돼 있다.


비극의 역사를 전해주는 추모공원·벽화

벨파스트 시내에서 구교도는 폴스 로드(Falls Load), 신교도는 샨킬 로드(Shankill Road)라 불리는 지역에 주로 모여 산다. 분리지역 근처에는 분쟁 벽화, 희생자 추모비가 곳곳에 설치돼 스산한 분위기가 감돈다.

북아일랜드의 비극을 나타내는 ‘바비 샌즈의 벽화’ 앞은 관광객이 많이 찾는 장소다. IRA 소속인 샌즈는 테러 혐의로 영국 경찰에 체포됐다. 14년 형을 받고 복역하던 1981년 3월 1일, 자신을 테러범이 아닌 정치범으로 취급해 줄 것을 요구하며 단식을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총리 대처는 전혀 양보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정치범 인정은 IRA를 합법단체로 승인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단식 66일째, 27세의 샌즈는 결국 숨을 거뒀다. 그의 죽음에 자극받은 동료들은 줄이어 단식투쟁에 참여했고, 이후 9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샌즈의 단식은 끝내 영국 총리의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IRA의 정치력을 크게 강화했다.

또한, 신교도 무장단체 활동 벽화 및 북아일랜드 사태 희생자 기념공원도 있다. 전형적인 영국식 다가구 주택가 속의 추모비에는 희생자 명단과 대표 인물 사진들이 있다. 신·구교 기독교인의 최고 가치는 ‘인간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이다. 하지만 서로의 이권 다툼에서 그들의 신앙심은 전혀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벨파스트 시청사 2층 계단 벽면에 전시된 부대상징물. 왼쪽은 북아일랜드 관련 해·공군부대 마크이며 오른쪽은 육군 지역연대 부대마크다.
벨파스트 시청사 2층 계단 벽면에 전시된 부대상징물. 왼쪽은 북아일랜드 관련 해·공군부대 마크이며 오른쪽은 육군 지역연대 부대마크다.


‘타이타닉’ 대참사가 생생히 재현된 기념관

1911년 세계 최대의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이 항구도시 벨파스트에서 3년간의 대역사 끝에 태어났다. 배수량 5만2310톤, 전장 269m, 정원이 3300여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 배는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샘프턴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처녀출항 후, 4월 15일 밤 11시40분쯤 빙하와 충돌해 침몰했고 1514명이 사망했다. 세계 해난사고 중 가장 큰 인명 피해였다. 이 비극적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웅장한 ‘타이타닉 기념관’이 벨파스트 항구에 있다. 이곳에는 선박 건조, 사건 경과, 증언록, 후속 조치 등의 자료 전시와 더불어 첨단기술을 활용해 당시 사고 상황을 재현하고 있었다.

타이타닉은 운항 중 이미 다른 선박들로부터 여섯 차례의 빙산 주의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도 이 배를 침몰시킬 수 없다!’라는 은근한 자만심과 경고 메시지를 받은 통신사의 무감각이 결국 비극을 초래했다. 함교 견시들이 전방 450m 앞의 높은 빙산을 발견했지만, 덩치 큰 타이타닉이 방향을 전환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배 옆구리가 빙산에 심하게 들이받혔고, 2시간30분 만에 이 배는 수심 4000m의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특히 배가 침몰하는 대혼란 속에서도 8명의 선상 악단은 승객들을 안정시키고자 찬송가를 연주했다. 영화 ‘타이타닉’ 속의 인상적인 이 장면은 실화다. 보트로 탈출한 승객들은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바이올린 연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수백 년 군사전통을 보여주는 시청역사관

벨파스트 시청 건물은 고색창연한 하얀 외벽과 아름다운 내부 장식으로 이름난 관광 명소다. 정원에 있는 보어전쟁 기념 동상을 지나 청사 현관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전몰용사 추모 비각 앞의 화환이 나타난다. 그리고 2층 계단 벽면에는 수백 년 전통의 지역연대 마크들이 빼곡히 부착돼 있다. 물론 오늘날 이 부대들은 대부분 해체됐다. 영국 육군은 전통적으로 같은 지역 출신 청년들로 연대를 편성했다. 형제·친구·동창인 부대원들의 전우애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전장에서의 비겁함은 평생 수치로 남았고, 목숨을 돌보지 않는 영웅적 행동은 고향 집안의 명예를 더 높였다. 요즘도 영국 도시에서는 ‘○○연대 기념관’ 표지판이 붙은 작은 건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층 시청 역사관 전시물 대부분이 제1·2차 세계대전 때의 북아일랜드인 생활상으로 채워져 있다. 영국 본토와 떨어진 이 섬은 전쟁 중 후방지원기지 역할을 했다. 공습·군수공장·상륙발진기지·미군병영·전후복구 등 온통 전쟁 사진들이다. 영국인들이 과거 피눈물로 쟁취한 선조들의 찬란한 승리의 역사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사진=필자 제공 <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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