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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사 5월6일] 1996년_합참의장 역임 한신 장군 별세

입력 2019. 05. 06   13:33
업데이트 2021. 05. 06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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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국방일보 DB
사진 = 국방일보 DB

철원 고석정을 돌아 건너는 승일대교 인근의 승일공원에는 여러 비석이 자리하고 있고 그 중 ‘맹호’ 마크가 눈에 띄는 비가 나온다. ‘맹호부대장 송덕비’(아래 사진)라고 한자로 전면에 쓰여 있다. 주인공은 한신(韓信) 장군이다.


후면에는 ‘맹호부대장 한신장군은 당 지구 주둔 당시 다방면으로 물심양면에 선(宣)하야 공헌하신 바 업적이 지대함인져! 그(其) 공적을 영겁히 찬양할지어다’ 라며 인근 문혜리 내대리 주민들이 칭송한 건립 취지의 글이 희미하게 보인다.

한신 장군은 1956년 7월부터의 사단장 재임 동안, 특히 1957년 7월 철원 지역으로의 부대 이동 후 장군은 실전적 교육훈련, 공평한 인사관리와 신상필벌로서 최강의 부대전통을 계승, 발전시켜나가는 한편 무의촌에 의무대 지원, 교육 및 체육시설 설치 및 보수 지원, 농번기 일손 지원 등 엄정한 군기 속에 폭넓은 대민지원 활동을 펼쳤다.

당시 지역주민들은 막걸리 한 잔도 사양하는 장병들을 보며 “이번에 교대해온 사단에는 양반집 자식들만 모여 있는 모양이야”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장군이 사단을 떠난 뒤 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한신 장군은 대쪽같은 청렴결백한 군인으로서 오늘도 사람들의 기억에 뚜렷한 장군은 1922년 함남 영흥군에서 출생, 함흥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대학(법학) 유학 중 강제징병을 당했으나 광복과 함께 귀국, 고향에 머물다 공산 치하를 벗어나 월남했다. 법학도의 꿈을 접고 신생 독립국의 호국간성이 되고자 1연대에 이등병사(이등병)으로 입대한 애국청년이었다. 이때 장군은 새 삶을 결심하면서 본명(한원극)을 ‘믿음’을 뜻하는 신(信)으로 바꿨다.

또 육사 2기생으로 임관, 6·25전쟁 중에는 수많은 전투에서 용전하면서 승리를 거듭하며 태극무공훈장을 받는 등 승전의 전투지휘관이었으며 휴전 후에는 사단장, 군단장, 야전군사령관, 합참의장을 역임하면서 강군육성에 이바지했다.

그 30년의 군 생활 동안 장군은 참군인다운 일화를 수없이 남겼다. 사단장 부임 후 예하 부대에 하달한 지침 중 ‘잘 먹여라(食) 잘 입혀라(衣) 잘 재워라(住)’는 익히 널리 알려진 사실. 몹시도 곤공했던 시절 병사들의 사기와 근무의욕을 북돋기 위한 장군의 의지였던 바 내무생활 개선을 위해 병사용 베개와 매트리스를 만들어 지급한 것도 전군에서 최초로 그가 한 일 중 하나였다.

특히 6군단장 재임 때(1964년)에는 정보참모 신윤헌 대령의 아이디어를 수렴해 군단 관할 GOP선상에 가설케한 목책은 지금 철책의 원조로서 장군의 큰 업적 중 하나. 목책이 수명도 짧아 재설치해야 하는 단점이 없지 않고 그 같은 울타리가 적을 막아주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북한군의 잦은 침투를 경계하는 데에는 최선으로 평가되었다. 그로부터 3년 뒤, GOP선상에는 철책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6·25전쟁 중 그는 고향 방면으로 진군할 수도 있었으나 작전명령과 작전계획에 충실, 고향을 먼발치에서 조차 보지도 못했던 장군은 1975년 3월 예편했으며 1996년 5월 6일 영면에 들었다. <국방일보 1998년 1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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