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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이야기] 우리 해군 최초 유도탄 고속정 ‘키스트보트’ 탄생

윤병노 기사입력 2019. 04. 26   16:12 최종수정 2019. 05. 01   08:28

<42> 국산 건조 함정의 시작 ‘키스트 보트’ ‘학생호’ ‘제비급 고속정’

1970년 ‘학생 방위성금’ 투입해 해군 자체 설계로 고속정 ‘학생호’ 건조
이후 고속정 양산 급물살…빠른 스피드 자랑 ‘제비정’ 4년 새 25척 완성
1980년 경북 포항 간첩선 격침 수훈 등 ‘제비정’ 한반도 연안 수호 앞장

항해 중인 학생호.


북한 해군의 위협이 날로 증가하던 1970년 초 우리 해군 함정이 납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서해안 연평도 근해에서 우리 어선단을 보호하던 방송선 1척이 북한 해군 고속경비정 2척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납북된 것. 이에 격노한 고(故) 박정희 대통령은 고속함정의 국내 건조를 시급히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해군은 1970년 7월 29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기본설계 용역 계약을 체결했고, 국산 고속함정 개발·건조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와 해군, KIST, 조선소가 힘을 합한 결과 국내 최초의 전투함정이 탄생했다. ‘키스트 보트(KIST Boat)’와 ‘학생호’, 이를 기반으로 양산한 ‘제비급 고속정(PK:Patrol Killer)’이 주인공들이다.


빠른 속력을 자랑했던 제비정의 기동 모습. 제비정은 한반도 연안으로 침투하는 북한 간첩선에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국내 건조 열망 ‘키스트 보트’ 열매

키스트 보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기본설계를, 해군 공창(현재 정비창)이 건조를 담당했다. 기능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외부 숙련공을 초빙해 해결했다.

국산 함정 건조는 쉽지 않았다. 국내 조선 기술이 미비했을 뿐만 아니라 모형시험을 할 수 있는 수조(水槽)도 없어 미국 미시간대학교의 수조를 사용했다. 선형은 외국 함정을 참고했으며, 구조 강도는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국산 함정을 만들겠다는 열의는 1972년 1월 22일 진수를 거쳐 4월 7일 해군에 키스트 보트 2척을 인도하는 열매를 맺었다. 다만 30노트(시속 55.5㎞) 이상의 고속에서 엔진 과열 현상이 일어나 정지되는 문제는 숙제로 남았다.

이 같은 애로사항은 함대함유도탄 엑조세(Exocet)를 장착할 때 코리아타코마 기술진이 해결했다. 코리아타코마는 미국의 타코마 조선소와 합작으로 백구급 유도탄고속함을 건조하면서 선진 기술을 습득했다.

미국은 한국이 프랑스에서 도입한 엑조세를 자국이 지원한 함정에 설치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로 인해 키스트 보트에는 엑조세가 탑재됐다. 키스트 보트는 1975년 엑조세를 장착하면서 우리 해군 최초의 유도탄고속정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유도탄고속정은 스틱스(Styx) 함대함유도탄을 장착한 북한의 코마(KOMAR)급과 오사(OSA)급 고속정이 도발하면 최상의 대응전력으로 활약했다.



해군 자체 설계 능력으로 건조 ‘학생호’

키스트 보트는 추후 건조할 함정의 시제품 성격이 강했다. 추진기관도 1호정과 2호정이 달랐다. 키스트 보트가 한참 개발되고 있을 시점에 또 다른 고속정을 건조하는 계획이 병행됐다. 이번에는 해군이 주관했다. 바로 학생호다.

1970년 11월 5일 박 대통령은 학생 방위성금 3억8000만 원을 해군에 배정하면서 고속정의 외국 구매를 지시했다. 1·21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태 이후 학생들이 모은 ‘방위성금’을 해군 고속정 도입에 투입한 것이다.

해군은 자체 개발을 원했다. ‘고속정 국내건조 계획서’를 만들어 상부에 보고했고, 대통령도 이를 허가했다. 학생호와 키스트 보트 건조를 동시에 추진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부서가 필요했다. 해군은 1971년 1월 22일 해군본부 함정감실에 조함과를 설립했다.

해군은 약 9개월에 걸쳐 기본설계를 했다. 이어 대한조선공사와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 건조 과정에서 재설계가 반복됐지만 학생호는 건조 착수 12개월 만인 1972년 11월 18일 진수됐다.

국방부 장관 주관으로 열린 진수식에는 전국의 학생 대표 2000여 명이 초청됐다. 함명도 학생 성금에 의해 건조된 함정이라는 뜻에서 ‘학생호’로 명명했다.

학생호는 해군이 주관해 자체 설계 능력으로 만든 최초의 고속정이었다. 학생호의 성공은 이후 중형 고속정과 구축함까지 국내 건조를 시도하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1972년 11월 18일 개최된 학생호 진수식 및 명명식. 학생호는 800만 명의 학생과 20만 명의 교직자들이 낸 애국방위성금으로 건조됐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간첩선 격침


해군은 키스트 보트와 학생호 건조를 완료한 뒤 고속정 양산 계획을 수립했다. 두 가지 모델 중 선택된 것은 학생호였다. 해군은 이를 PK 건조사업으로 불렀다.

PK는 학생호와 기본 틀은 같지만 형태를 변경하고, 추진기관과 무장이 향상됐다. 배수량도 증가했다. 고속정은 조류명을 함명으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제비’를 부여했다.

해군은 대한조선공사·코리아타코마와 제비급 고속정 건조계약을 체결하고, 1975년부터 1978년까지 25척을 건조했다.

빠른 스피드를 자랑하는 제비정은 한반도 연안으로 침투하는 북한 간첩선에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1980년 3월 25일 자정 경북 포항에 전개 중인 201편대에 의아선박을 접촉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긴급 출격한 201편대는 제비 59호정을 선두로 의아선박에 접근했다.

거리가 약 700야드로 좁혀지자 의아선박이 기습사격을 하면서 침로를 변경했다. 간첩선이었다. 201편대는 전속 추격했고, 주변에 있던 다른 편대와 항공기도 투입됐다. 새벽 3시가 가까웠을 때 제비 59호정과 기러기 18호정이 격파사격을 했다. 간첩선은 화염을 내뿜으면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에 앞서 제비급 고속정은 고흥반도 근해에서도 무장간첩선을 격침했다. 1978년 4월 28일 간첩선 신고를 받은 해군은 인근의 고속정 편대에 긴급 출항을 명령했다.

제비 75호정과 73호정은 항공기 유도를 받으며 무장간첩선을 추격한 뒤 20여 분의 교전 끝에 간첩선을 격침했다. 이 작전으로 해군은 간첩 4명을 사살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장병 1명이 전사했다.

1978년 7월 21일에는 통영 앞바다에서 해양경찰 선박에 사격을 가하고 도주한 간첩선을 제비 56호정과 57호정이 미조도 근해에서 격침했다.

글=윤병노 기자/사진=해군본부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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