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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해군 함정 납북 충격… 이후 연구 서둘러

신인호 기사입력 2019. 04. 19   17:20 최종수정 2019. 04. 20   15:07

<41> 국산 함정, 그 시작의 배경

국방기술품질원은 지난 16일 주요국 무기체계의 수준을 분석한 『2018 국가별 국방과학기술수준조사서』를 펴내면서 우리나라의 국방과학기술 수준이 세계 9위라고 밝혔다. 특히 기술조사서는 함정 분야의 과학기술 수준이 화포 분야(7위)에 이어 세계 8위라고 소개해 주목된다. 창군 이후 거의 모든 함정을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해 도입·보유했던 우리나라가 언제, 어떤 계기로 함정을 건조할 수 있는 역량을 이처럼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북한군 포격에 침몰하고 있는 해군 당포함.


방위산업 육성 전담부서 설치 지시 


우리나라 방위산업에 대한 구상이 처음 공식화된 것은 1970년 1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부를 연두 순시하는 자리에서였다.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방위산업 육성과 국방과학기술 연구가 시급함을 강조했고, 2월 2일에는 국방부에 ‘방위산업 육성 전담부서’ 설치를 지시했다. 국방부는 이에 따라 군수국 산하에 군수산업육성담당관실을 설치해 방위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기본방침 연구에 착수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방위산업 육성을 위한 최초의 제도적 조치였다.

이어 1970년 4월 25일 박 대통령의 방위산업 추진 전략에 관한 구상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 핵심은 ‘민수산업의 육성 보완을 통한 방위산업의 기반 구축’이었다. 민간의 산업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되 군 연구기관이 중심이 돼 사업을 관리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기술 측면에서 이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틀 뒤인 4월 27일 정래혁 국방부 장관에게 “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민간인을 고용해 KIST와 같은 수준으로 대우하는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또 6월 27일 국방과학연구소(ADD) 설립이 결정된 데 이어 8월 6일에는 ADD가 창설됐다.

당시 이처럼 무기체계 연구개발을 비롯한 방위산업 육성을 위해 정부가 발 빠른 조치를 취한 배경에는 당시 첨예했던 남북의 정치적·군사적 대립과 미국의 ‘닉슨 독트린’에 따른 대(對)한반도 정책의 변화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1967년 해군 당포함 격침 도발과 1968년 초 1·21사태를 시작으로 미 해군의 푸에블로함 납북과 정찰기 사건, 울진·삼척 무장간첩사건 등 일련의 북한 도발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북한의 해상도발은 해군에 큰 충격을 주는 동시에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된 미 해군 푸에블로함.


북한 고속함정 침투 대응 쉽지 않아


북한은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상을 통해 무장간첩선을 침투시켰다. 초기에는 10톤급 내외의 선박(12노트급)으로 접적지역 근해를 중심으로 침투했다. 해군은 이를 격멸할 수 있는 해상 방어체계 수립과 함께 대간첩작전을 강화했고 그 결과 1964년 8월 PC-707함이 간첩선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해군은 1960년대 말 기준으로, 구축함 3척을 비롯해 호위구축함·경비함·상륙함·소해함 등 90~100여 척을 보유해 총 톤수 면에서, 그리고 성능 면에서 북한을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북한의 해상침투 양상이 달라졌다. 육로보다는 해로를 간첩 파견 통로로 이용했다. 이를 위해 당시 북한은 함정 크기를 점차 대형화하면서 35노트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고속함정을 보유, 수시로 우리 영해를 넘나들었다. 달빛이 없는 그믐밤이면 어김없이 간첩선이 나타났다고 할 정도였다. 해군이 보유한 30노트 이상의 함정 몇 척으로 북한의 고속함정에 대응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군 방송선 피랍 ‘전쟁 도발’로 간주


그런데 1967년 해군을 긴장시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67년 10월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의 1730톤급 영국제 신예 구축함 에일라트(Eilat)함이 이집트의 75톤급 코마(Koma)급 초계정에서 발사한 스틱스(Styx) 함대함 미사일에 격침당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함대함미사일의 위력과 가치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이 고속함정을 북한도 보유하고 있었던 것. 북한은 소련에서 도입한 오사(Osa)급 미사일 고속정 등 고속함정이 50척 이상이었던 까닭에 해군으로서는 큰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 6월 5일, 해군 함정이 납북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해군 함정 납북은 창군 이래 이것이 최초였다. 이날 오후 1시40분 서해안 연평도 근해에서 우리 어선단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해군 소속 120톤급 방송선 1척이 북한 해군 고속경비정 2척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받고 납북된 것이다.

납북된 방송선은 20㎜ 기관포와 스피커가 장비돼 있었고, 속도는 8노트에 불과했다. 반면 북한 경비정은 250톤급에 40~50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고성능 레이더와 함께 57㎜ 무반동포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대간첩작전 역량 강화 위해


사건의 파장은 매우 크고 빠르게 번졌다. 창군 이래 해군 함정이 북한에 의해 납치되기는 처음이었던 이 사건을 두고 언론은 북한의 해상침투 능력을 거론하며 연안에서 우리 해군의 대간첩작전 역량 강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대통령은 북한의 납북 행위를 전쟁 도발 행위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하게 시급히 고속함정을 확보할 것을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는 ‘선박연구소’가 부설된 KIST에서 설계를 맡으라는 것이었다.

해군은 6월 28일 고속포함(高速砲艦)이라는 중형 고속정(PKM·Patrol Boat Killer, Medium) 건조안에 대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7월 29일 KIST와 기본설계 용역을 체결했다. 해군은 동시에 함정 건조를 담당할 조함과(造艦課)를 해군본부에 신설하고, 대간첩선 작전을 수행할 함정 모형 연구에 돌입했다.

계획을 세우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결과를 낙관할 수 없었다. 함정 건조는 물론 유지비용조차도 인건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군사원조에 의존하던 시기, 우리 해군의 조함 능력은 물론 국가 전체적으로 조함 능력은 거의 ‘0(zero)’에 가까운 시기였다. 국산 함정 건조의 첫걸음은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무겁게 내디뎌야 했다.

신인호 기자 < idmz@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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